상처받은 타자의 얼굴에 응답하기

리투아니아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1906~1995)는 주체가 주체로서 자신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 조건을 타인과의 윤리적 관계 속에서 모색한다. “헐벗은 모습, 고통 받는 모습,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불의에 의해 짓밟힌 자의 모습으로 타인이 호소할 때 그를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책임지고, 그를 대신해서 짐을 지고, 사랑하고 섬기는 가운데 주체의 주체됨의 의미가 있다는 것”(강영안,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이다. 벨기에의 형제감독 다르덴이 만든 <언노운 걸>(2016)과 이탈리아 이바노 데 마테오의 <더 디너>(2014)는 서로 정반대의 방향에서 레비나스적 화두에 화답한다.

니(아델 에넬)는 벨기에의 공업도시 리에주의 작은 병원에서 임시직으로 일하는 의사. 성실한 태도로 환자들의 신뢰를 얻은 그는 3개월 기한이 끝나는 대로 대형병원인 케네디 센터의 정규직으로 가게 됐다. 하지만 어느 날 밤 일어난 두 가지 사건으로 모든 것이 뒤틀린다. 갑자기 발작 증세를 보인 환자에 적절히 대응 못한 인턴 줄리앙(올리비에 보나드)을 강하게 질책했는데 의사를 그만두겠다며 다음 날 고향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진료시간이 지나 줄리앙을 질책하던 바로 그 때 일어난 또 하나의 사건은 더 중차대했다. 벨소리가 울리자 인터폰으로 응답하려던 줄리앙을 제니가 제지했는데, 다음 날 형사들이 찾아온다. 지난 밤 병원의 벨을 눌렀던 흑인소녀가 시체로 발견됐다면서 CCTV 자료를 요청한 것이다.

두 사건의 발생 자체에 제니의 의지가 개입된 것은 아니었다. 줄리앙은 어린 시절 가정폭력의 피해자였던 트라우마의 작동으로 인해 의사가 되고자 했던 의지를 포기한 것이었다. “근무시간이 지났으니 대답을 안 해도 되며, 급한 일이면 또 누를 것”이라는 제니의 판단에 대해 의사의 윤리를 질문할 수는 있겠으나 이를 흑인소녀의 죽음에 대한 책임으로 귀결 짓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선생님의 잘못은 아니지요.” 경찰들도, 주변 동료들도 제니를 위로한다. 어쩌면 제니 스스로도 자신의 전적인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후 제니가 보이는 행동은 자신이 연루된 두 사건에 대해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으며 할 수 있는 한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다. 줄리앙에게 전화를 걸고, 멀리 고향으로 찾아가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그가 다시 의사로서 소명의식을 북돋울 수 있도록 격려한다. 근무 시간과 일을 끝낸 이후 많은 곳들을 찾아다니면서 CCTV에 찍힌 소녀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고 “이 소녀를 아는가” 묻는 것은 이름조차 없이 쓸쓸히 가매장된 소녀를 다시 원래의 이름과 역사를 가진 존중받는 한 사람으로, 가족과 이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들의 모든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적 주제로서 ‘환대’에 관한 다르덴 형제의 최신 영화 <언노운 걸>에서 제니는 ‘안티고네’의 역할을 수행한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에서 배신자의 매장을 금하는 왕 크레온에 맞서 외로이 죽어간 오빠 폴리네이케스를 매장하려던 안티고네는 결국 죽음을 맞는다. 흑인소녀의 이름을 되찾아주고 매장해주고자 하는 제니의 의지 또한 저항에 부딪친다. 흑인 이민자 집단의 완강한 외면과 지역 폭력조직의 물리적 위협을 자초하고, 경찰조직으로부터 중단 경고를 받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굴하지 않고 반복되는, “이 소녀를 아시나요?”라는 제니의 질문은 상처받는 타자의 고통을 대하는 사람들, 지역 공동체의 비윤리적인 민낯을 에누리 없이 드러낸다. 인간다운 삶을 꿈꾸며 낯선 땅에 왔던 이국의 어린 소녀는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주의의 황야에서 끝내 상처받은 채 어둠 속에 버려져야 했다. 그 소녀를 탐하고, 고통에 기생함으로써 타자의 고통에 냉담했던 이들은 반복된 제니의 질문 앞에 조금씩 인간의 얼굴을 되찾는다. 환대보다는 적대가, 타인에 대한 연민보다는 배척이 만연화된 현실에서 “아무 것도 안 하는 걸 거부하고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걸 거부한다”는 다르덴 형제의 결연한 원칙이 만들어내는 작은 희망이 눈부시다.

 

끄러운 클랙슨 소리와 차량들로 뒤엉킨 한낮 로마 도심에서 권총 총격사건이 발생한다. 사소한 시비 끝에 중년 남성을 총으로 쏘아죽인 젊은 경찰을 변호사 마시모(알레산드로 가스만)가 맡는다. 아버지의 죽음을 맨눈으로 지켜본데다 척추골절을 당한 피해자의 어린 아들을 소아과 의사 파올로(루이지 로 카시오)가 치료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자리에서 맞서게 된 두 사람은 10년째 최고급 식당에서 한 달에 한 번 형제모임을 갖는 세상에 둘도 없는 형제. 키마저 훤칠한 잘 나가는 냉철한 변호사 형과, 넉넉한 자애와 인간적 태도로 존경받는 소아과 의사 동생의 관계는 그러나 사건 이전부터 원만하지 못했다.

서로에 대한 존중과 애정보다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결핍감을 상대에 대한 폄훼와 비난으로 해소해온 시간이 너무 길었던 탓이다. 새 형수인 ‘바비 인형’ 소피아(바보라 보부로바)의 ‘화려한 의상 과시’에다 ‘비싼 곳만 좋아하고 와인 평론가연하는’ 형 내외의 속물적 고급취향에 대한 비아냥은 파올로와 클라라(지오바나 메조기오르노) 부부의 오래된 취미가 된 듯하다. 그러니 사건 이후 저녁식사가 평화로울 리 없다. “어떻게 그런 쓰레기들을 변호하나 몰라”, “내가 함부로 판단할 순 없지. 누구나 변호 받을 권리는 있어.” ‘한심하고 멍청한’ 형과, ‘자기 확신이 지나쳐 늘 남을 가르치려 드는’ 동생의 거리를 확인할 뿐이다.

하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가 그들에게 닥친다. 일찍 세상을 떠난 전 아내가 남긴 마시모의 고등학생 딸 베니(로사벨 라우렌티 셀레르스)는 작은 아버지인 파올로의 집을 수시로 드나들며 새엄마인 소피아보다 클라라와 더 막역하게 지낸다. 친남매처럼 붙어 다니던 베니와 파올로의 아들 미켈(자코포 올모 안티노리)은 파티에 다녀오던 늦은 밤, 차를 타려다가 시비가 붙은 노숙자를 구타하고 방치한 채 집으로 돌아온다. 한밤 중 청소년들에 의해 집단구타 당하고 혼수상태에 빠진 48세 노숙자 여성에 대한 각종 보도와 CCTV 화면이 방송과 인터넷을 뒤덮자, 앞서거니 뒤서거니 두 집안 모두 사실을 알게 된다. 부모 눈에 선명하게 드러나는 두 아이들을 어두운 동영상 속에서 발견한 것이다.

네덜란드의 헤르만 코흐가 쓴 베스트 셀러 『디너』(2009)를 각색한 <더 디너>에서 인물들은 평생에 걸친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부모로서의 의무 및 책임감, 윤리적 소명에 부응해야 하는 공동체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요구 등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들이 뒤엉키는 질문 앞에서 대답을 찾아 헤맨다. 형제 중에서 더욱 심한 갈짓자 행보를 보이는 것은 파올로와 클라라 부부인데, 형의 냉철한 전문가주의를 속물적 행태로 혐오하던 이들은 주변으로부터 지지받던 자신의 신념이 시련에 봉착하자 누구보다도 나약한 모습으로 내부 붕괴되며 서로를 향해 비난의 목소리를 높인다.

“죄송하지만 우리 잘못은 아니야.”, “이런 걸로 우리 인생을 망치는 게 말이 돼? 그깟 노숙자 때문에? 웃기잖아. 아빠가 잘 해결해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딸 베니의 말은 냉철한 현실주의자 마시모를 결정적으로 각성시키며 합리적 방안을 모색하게 만든다. 하지만 혼수상태에 빠진 노숙자 여성을 찾아 병원에 들른 형과 달리 가해당사자인 아이들과, 그들의 훼손될 장래만을 안타까워하던 부모 파올로와 클라라는 단 한 번도 피해자인 노숙자 여성, 죽음의 기로에 놓인 상처받은 타자를 궁금해 하지 않는다. 그렇게 철저한 외면과 냉대, 적대의 과정에서 <더 디너>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더 디너>는 당혹스러운 오프닝으로 출발해서 그보다 더 황망한 엔딩으로 끝난다. 관객의 상상을 향해 전적으로 열려있는 이러한 엔딩은 “당신이라면-당신 가족의 이야기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의 질문을 관객들에게 직접적으로 던지기에 효과적인 선택이기도 하다. <언노운 걸>에서 흑인소녀의 사진과 함께 영화 속 인물들을 향해 지치지도 않고 반복되는 제니의 질문에 대해 다르덴 형제는 “제니의 도덕적 죄의식이 다른 이들을 어떻게 건드리는지 보고 싶었다”고 설명한다.

두 영화 속 인물들은 나름의 합리성과 균형감을 바탕으로 안정적으로 작동되던 자신들의 일상에 느닷없이 ‘현현한 타자의 얼굴’이라는 레비나스적 화두에 대한 정반대의 대응을 보여준다. <언노운 걸>에서 박해받는 안티고네를 자처하는 제니는 큰 병원의 좋은 의사 자리마저 거부하고 돈 없어 상처받는 타자들과 함께 하는 변두리 의사의 길을 계속 가기로 결정한다. “나의 존재 유지를 포기하고 고통 받는 타인을 위해 고통조차 감수하고자”(강영안, 앞의 책) 함으로써 레비나스가 권하는 ‘환대로서의 주체성’을 정립한다.

반면 <더 디너> 속 형제들의 비극은 고통 받는 타자의 얼굴의 현현에 접했다고 해서 “타자를 향해 눈을 돌리는 일이 저절로, 자연적으로, 우리의 일상적 사고와 태도를 가지고서는 쉽게 일어나지 않”(강영안, 〃)음을 보여준다. 저 바깥으로부터 들려오는 윤리적 명령보다 손닿는 지근거리의 일상과 사람들을 보존하고자 하는 욕망의 강력함을 환기시키는 영화적 파국은 강렬하다. 뭉클한 감동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나 다르덴 형제의 전작인 <자전거 탄 소년>을 환기시키는 <언노운 걸>이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보다, 타인의 얼굴을 외면한 채 ‘그깟 노숙자’의 목숨 값을 저울질하는 <더 디너> 속 인물들이, 부끄럽게도, 더 익숙하게 느껴지기에 더욱 그러하다. /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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