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날아요, 저 하늘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는 끊이지 않고 우리들을 찾아온다. 평범한 이들은 어쩌면 단 한 번도 맛보지 못할 궁극의 절정, 그 희열의 순간을 맞닥뜨릴 행운의 소유자들의 이야기는 종종 신화적 아우라에 싸인다. 하지만 결국 그들조차 인간이었음을 이야기하는 순간들이 있어 평범한 이들과의 공감은 가능하다. 탄광촌의 미운 오리새끼가 아름다운 백조로 변신하는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빌리 엘리어트>(2000), 우크라이나의 세계적인 천재 무용수 세르게이 폴루닌의 다큐멘터리인 <댄서>(스티븐 캔터, 2016)는 천부적 재능을 부여받은 이들의 도약과 하강, 좌절과 비상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치백 앞에 선 소년의 몸이 출렁인다. 피아노 반주에 맞춘 ‘하나, 둘, 셋…’ 구령에 맞춰 소년의 몸이 앞으로 뒤로 흔들린다. 좀 더 효과적으로, 강력하게 상대를 가격하기 위해 집중해서 때려야 하는 펀치백이 마치 호흡을 나누는 댄스 파트너 같다. 대처정부의 구조조정에 맞선 탄광파업이 한창인 1984년 영국 북동부 더램. 노조에게 1층을 내주고 올라온 윌킨슨 부인(줄리 월터스)의 발레교실과 한동안 2층 공간을 나눠 써야 하는 권투클럽의 ‘열등생’ 빌리(제이미 벨)에게 비밀이 생기는 순간이다. 곤궁한 살림살이에도 50센트씩 내가며 ‘남자의 운동’을 배우기를 원하는 광부 아버지 재키(게리 루이스)에게 말 못할 ‘비상(飛上)’의 욕망이 생긴 것이다.

고작 11살일 뿐인 빌리 앞의 난관은 적잖다. 계속된 파업으로 여유 없던 살림살이는 더 팍팍해져서 유일하게 남은 엄마의 유품 피아노마저 부수어 땔감으로 써야 한다. 더욱이 낡은 권투 글러브를 3대째 물려 쓰는 광부 집안에서, 하필 권투나 축구, 레슬링도 아닌 발레를 하고 싶다는 소년의 꿈을 위한 승인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남자로 태어났으니 세상이 말하는 남자다움을 학습해야하며, 남자들이 늘 하는 일을 하면서 먹고 살아야 하는 삶만을 보고 아버지 재키는 여태껏 살아왔다. 윌킨슨 부인의 어린 딸 데비(니콜라 블랙웰)도 아는 사실, 그러니까 세상에는 발레 하는 남자들이 꽤 많고, 다른 운동선수 못잖게 체력도 좋다는 걸 그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빌리 엘리어트>는 춤추고 싶은 소년의 성장 서사인 동시에, 아들의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앎의 세계가 부서지는 중년 남성의 ‘아버지-되기’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얀 눈 쌓인 크리스마스 밤의 추운 체육관에서 그는 본다. 두려움 없이, 거절의 공포도 물리친 채 아들 빌리가 높이 도약하는 것을. 발레의 규칙, 무용의 완고한 전통 따위 익히지 못한 채로 몸의 명령을 좇아 자유로움에 대한 날 것 그대로의 갈망을 표출하는 빌리에게서,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복서와 다르지 않은 어떤 것을 본다. 발레의 ‘B’자도 모르지만, 이토록이나 내 아들을 낯설어 보이게 만드는 저것이 발레라면, 받아들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냥 기분이 좋아요. 조금 어색하기도 하지만 한 번 시작하면 모든 걸 잊게 되죠. 모든 게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아요. 내 몸 전체가 변하는 기분이죠. 그저 한 마리 나는 새가 되죠. 마치 전기처럼. 네, 전기처럼요.” ‘새처럼 나는’ 아들의 비상을 위해 아버지는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한다. 아무리 가난해도 돈 몇 푼에 아비의 자존심을 팔지 않고, 지원을 위한 가능한 모든 것을 한다. ‘더러운 배신자’ 낙인을 들어가면서, 어두운 갱도로 내려가는 것이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아들의 ‘상승’은, 그 모든 것의 억압을 묵묵히 감수하는 아버지의 ‘하강’이 있어 가능해진다.

<빌리 엘리어트>에서 발레가 선사하는 예술적 감흥의 세계는 돌멩이와 경찰 곤봉이 거칠게 맞부딪치는 파업현장과 충돌한다. 어둡게 하늘이 내려앉은 가난한 탄광촌 골목을 뛰어다니며 도약하는 어린 빌리의 모습은 현실과 판타지를 잇는 영화의 자리를 잘 보여준다. 앞장 서 파업을 이끌었던 형 토니(제이미 드레이븐)와 아버지를 이어 노조는 패배하지만 현실의 구심력에서 벗어난 영화는 감동의 엔딩을 향해 달려간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언젠가 크리스마스 날 밤처럼 아버지의 머리에는 하얀 눈이 쌓인다. 세상이 하얗던 그날 체육관에서 그랬던 것처럼, 백조가 된 어른 빌리(아담 쿠퍼)는 하늘로 높이 솟구친다. 공중에서 영원히 멈추어버린 듯 도약한 빌리에게는 소리 없이 흐르는 아버지의 눈물은 보이지 않는다.

 

크라이나 남부 작은 도시 헤르손에서 1989년에 태어난 세르게이 폴루닌에게는 빌리처럼 욕망을 승인받는 지난한 절차 따위 필요하지 않았다. 주머니 속 송곳처럼 누구의 눈에도 띌 수밖에 없는 천부적 재능으로 6살 때부터 발레를 시작한 그는 키에프 국립발레단으로, 다시 런던의 로열발레 학교로 막힘없이 승승장구한다. 아들의 천재를 확신한 엄마의 결단은 그때마다 옳았고, 결국 19세 때 영국로열발레단의 최연소 수석무용수라는 영광의 자리에 도달한다.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은 세르게이 폴루닌’의 신화가 마지막 퍼즐을 찾은 듯했다.

“좋은 시절은 그때 끝났던 것 같아요.” 엄마의 손에 이끌려 ‘모두가 가난했던’ 헤르손을 떠나 키에프로 향한 9살 때를 돌아보는 세르게이의 회상은 “전 세르게이가 뭔가 이루길 원했어요. 우리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게요”라고 말하는 엄마 갈리나와 명백하게 어긋난다. 엄격하고 혹독하게 발레 연습을 독촉했던 엄마와 달리 어린 세르게이와 레슬링도 하고 장난도 치며 놀아주던 아빠가 포르투갈로, 상냥한 할머니가 그리스로 각각 흩어져야 했던 게 그때였다. 가진 것 없는 폴루닌 집안의 천재가 버티기에는 키에프의 모든 것은 너무나 비쌌기 때문이다.

13살의 세르게이는 영국로열발레학교에 입학한다. 비자 문제로 엄마가 떠난 뒤 홀로 남은 그는 남들보다 몇 배의 연습에 매달린다. 자신이 잘해야 가족이 함께 살 수 있는 희망이 생긴다는 생각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달리고 뛰어오르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천부적 재능에 더해진 노력으로 클래스에서 톱의 자리를 확고히 하게 된 15살 때, 엄마 아빠가 이혼한다. 그에게 발레 하는 동기가 변한 시점이었고, ‘발레계의 배드보이’가 탄생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모든 걸 좋았던 시절로 되돌릴 수 없었어요…다신 상처 받지도 말고 누굴 측은해 하지도 말자고 다짐했죠. 아무도 그리워하지 말고, 추억도 만들지 말자고. 그때 울고 몇 년 간은 안 울었어요.”

더욱 단단해진 ‘댄싱 머신’은 2009년 역사상 가장 빠른 최연소 수석 무용수로 전세계 무용계를 놀라게 한다. 하지만 정작 세상이 주목하고 떠들썩해진 건, ‘경이로운 어린 발레리노’의 천상의 예술적 성취가 아닌 예측 불가능한 기행들이었다. 약물과 문신, 파티광, 리허설 불참 등으로 계속된 스캔들의 끝은 2012년 1월 24일 갑작스런 발레단 탈단이었다. 그날 세상은 경악했지만, ‘발레의 룰을 따르면서도 그 안에 자신의 색깔을 넣어’ 춤추던 천재적 발레리노는 팬티마저 벗어버린 나신으로 눈 덮인 런던의 밤거리를 질주하며 비로소 처음의 자유를 만끽했다.

스티븐 캔터의 다큐멘터리 <댄서>에서 유투브 영상 ‘Take Me to Church’는 채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 천재의 드라마틱했던 예술 여정을 요약한다. 하와이 마우이 섬에서 9시간 동안 울면서 찍었다는 그 영상에서 세르게이 폴루닌은 “춤출 때 어떻게 추는지 생각 안 해요. 춤이 그냥 저예요…그냥 느끼는 대로 춰요”라고 말하는 탁월한 천재면서, “마치 포로가 된 기분이죠. 나 자신의 몸에, 춤에 대한 열망에…제가 발레를 택한 게 아니었어요. 엄마의 선택이었죠. 제발 어디든 다쳐서 다신 못 추게 되길 바랐었죠”라고 회의하는 평범한 인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 춤이 될 뻔했던 그 영상에 쏟아진 세상의 찬사와 지지에 힘입어 세르게이는 다시 춤출 의지를 다진다.

능이라는 축복은 한 개인에게로 향하지만 그 재능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는 개인을 넘어선 무언가가 요구된다. 그 몫을 떠안는 것이 가족이 될 때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누군가의 이야기는 가족에 관한 것이 된다.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펼쳐지는 감동적 도약의 순간에 <빌리 엘리어트>의 허구와 <댄서>의 현실이 조우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어린 세르게이를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거나 외국으로 노동하러 떠났던 ‘팀 폴루닌’의 헌신, 어린 빌리를 런던으로 보내고 계속 지원하기 위해 <빌리 엘레이트>가 생략했던 가족의 희생은 재능은 하늘의 것이되, 천재는 지상의 산물임을 새삼 환기한다. 혹은 재능의 크기, 성취의 밀도와 역행하는 인간적 상처의 깊이도.

현재진행형의 천재 이야기를 다룬 <댄서>는 흑해를 바라보는 우크라이나 남부 헤르손에서 키에프, 영국의 런던, 러시아 등으로 이어진 여정을 반대로 반복하는 구조로 만들어졌다. 떠들썩한 세상의 시선을 뒤로 하고 다시 키에프로 돌아간 세르게이는 마치 남의 집에 들어가듯 엄마가 사는 집에 들어가 냉장고를 열어보고 미처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시작됐던 처음의 장소, 헤르손을 찾는다. 어린 시절의 은사, 지인들을 만난 세르게이는 “사람들이 제 춤을 보면서 즐거웠으면 좋겠어요...더 날렵해져서 절 보는 걸 즐겁게 만들고 최고가 돼서 절 기억하게 할래요”, 해맑은 얼굴로 말하던 열 살 소년의 눈빛으로 얼마간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아무리 발레를 잘해도 부모를 화해시킬 수 없었던 것처럼, 천재의 재능으로 충분히 행복한 관중들도 정작 불행한 천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 그게 세르게이 엄마의 말처럼 ‘인생’이고 ‘책임’일진대, 현실의 중력이 강력한 만큼 솟구치는 도약은 더욱 아름답다. “전 하고 싶었던 모든 걸 했어요. 이젠 평범한 삶을 갖고 싶어요.” 평범한 삶의 지루함과 진부함에 넌더리를 내는, 날 때부터 평범한 이들은 그래서 세르게이와 빌리처럼 세상의 모든 재능 있는 이들에게 조금 더 넉넉한 행복이 허락되길 바라게 된다. 넘보지 못할 비범이 평범한 이들을 종종 좌절에 빠뜨리기는 하지만, 그보다 몇 배 큰 천상의 아름다움으로 위로받는 어떤 기회들은 분명 평범 밖에서 오기 때문이다.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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