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해요, 사랑하는 아버지…”

세상 모든 관계가 다 쉽지 않다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특히 어렵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진단도 어렵고, 그런 만큼 처방은 더욱 힘들다. 적잖은 영화에서 갈등 해소가 지나치게 안이한 봉합으로 머물거나, 끝내 화해에 이르지 못한 파국에서 느닷없이 걸음을 멈추는 것도 그 때문이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로버트 듀발의 나이를 뛰어넘는 카리스마와 원숙함이 불꽃을 튀는 <더 저지>(제임스 돕킨, 2014)와, 연출·각본·주연을 맡은 양익준의 존재감이 압도적인 <똥파리>(2009)는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 다다른 두 개의 종착점을 선명하게 대조시킨다.

“난 네 바람막이 돼주고 주머니에 돈 채워주고 옷 입혀주고 먹여줬다. 내가 졸업식에 안 갔다고? 대학 등록금은 누가 내줬는데?” “아버지는 가석방되는 죄수들을 법정에 다시 불러놓고 복역 중 스스로 노력해서 삶을 변화시킨 이들을 인정해주셨죠. 법정에 있는 모든 이가 박수를 치게 만들었어요. 생판 남은 어찌나 자랑스러워하시던지.” 인디애나주를 강타한 거센 태풍으로 온 식구가 지하실로 대피해있는 동안 거실로 뛰어올라온 두 부자는 본격적으로 일합을 겨룬다. 아버지의 인정에 목말랐던 아들과, 돌아오지 않는 아들의 부재로 상처받았던 아버지는 오래 묵혔던 분노를 터뜨리며 서로를 물어뜯을 것처럼 으르렁댄다.

비 오는 밤, 자전거를 타고 가던 마크 블랙웰을 차로 치어 죽인 혐의로 피소된 조셉 파머 판사(로버트 듀발)와, 20년 동안 집을 찾지 않았던 아들이자 변호사인 행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위태로운 협력관계는 <더 저지>(The Judge)의 짧지 않은 러닝 타임 내내 삐걱댄다. “저는 도움이 아니라 아버지가 필요했어요!”, “넌 나쁜 길로 가고 있었어. 난 옳다고 생각한 일을 했다.”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고, 상처는 분리할 수 없는 한 몸이 돼버렸다. 법정에서처럼 논리로 잘못을 다투고, 형량을 타협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끊어진 기찻길을 달리던 열차처럼 대화는 늘 파국으로 끝나고, ‘42년의 명예’를 지키고자 하는 아버지/판사의 소망과, 무죄 입증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는 아들/변호사의 판단 또한 엇갈린다.

현명한 판사였으나 지나치게 완고한 가부장이었던 72세 4기 말기암 환자가 교도소로 향하는 결말은 그렇게 제 때 과녁을 찾지 못한 어긋남과 외면들의 결과로 제시된다. 정작 자신의 아들에게는 하지 못했던 “괜찮다”는 격려가 엉뚱한 이에게 향했던 순간 이후 그들 부자와 나머지 가족의 삶, 그리고 16세에 삶을 마감한 소녀와 20년 형을 살고 나와서도 저주를 퍼붓던 악한의 삶은 결정적으로 꼬여버렸다. 그 뒤늦은 깨달음 끝에 부자는 잔잔한 호수에서 낚시하며 어린 시절 유일하게 남았던 기억의 조각을 잇는다. 그리고 “최고의 변호사는 바로 너였다”, 아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인정/칭찬은 아버지의 유언으로 남는다. 실로 길고 길었던 인정투쟁, 사랑의 대혈투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아버지는 ‘아버지’였어야 하는 많은 순간에 ‘판사’였다. 반항심과 무모함으로 똘똘 뭉친 둘째 아들의 말썽이 벌어지던 자신의 가정이 ‘자신이 저지른 행동의 결과에 책임진다는 사실에 입각해 지어진 곳’, 즉 ‘신성한 법정’과 다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늘 ‘판사’ 대신 ‘아버지’를 간절히 원했던 아들에게 집은 ‘망할 놈의 피카소 그림’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판사님’이라고 부르는 어른이 됐다. 판사/아버지와 변호사/아들의 길고 길었던 인정 및 애정 투쟁을 이야기하는 <더 저지>는 ‘판사’와 ‘아버지’의 중첩된 자리를 통해 아버지의 자리, 아들의 자리, 가정이라는 곳의 위치를 질문한다.

<더 저지>를 여는 오프닝 장면들은 아버지의 돋보기와 신문, 메이저 리거의 능력을 가졌던 형 글렌(빈센트 도노프리오)의 야구공과 배트, 야구부원들 사진, 그리고 장애가 있는 막내 데일(제레미 스트롱)의 카메라를 비춰준다. 거기 둘째 아들 행크를 위한 숏은 없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 “여기가 내 고향이야”를 외친 행크는 42년 동안 아버지의 자리였던 법정을 찾는다. 이제 “그 동네는 갈 곳이 못 돼”를 외치게 했던, 행크 내면의 17세 소년은 영원히 떠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아버지 조셉의 이름이었던 ‘판사님the Judge’은 이제 행크의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대체로 그러한 것처럼, 그 모든 것은 너무나 늦게 찾아온다.

 

자비한 폭력과 듣기 험한 욕을 자기증명의 수단으로 하는 인생 쓰레기, ‘똥파리’를 자처하는 용역 깡패 상훈(양익준)에게 <더 저지>에서 행크의 분노 같은 건 차라리 애교 수준이다. 교도소에서 15년형을 살고 최근 출소한 그의 아버지 승철(박정순)은 가족들을 구타하는 것도 모자라 어린 동생을 칼로 찔러 죽게 했고, 그 때문에 엄마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니 ‘아버지’라고 부르기에도 아까운 버러지 같은 인물을 상훈은 무자비하게 구타한다. 작은 단칸방 앞에서 담배 한 개비로 호흡을 가다듬은 뒤 들어가 문을 안으로 잠근다. 그리고 퍽퍽, 비 오는 날 먼지 날 만큼 주먹을 날린다. 아침 햇살에 눈 뜬 다음날, 생수병을 들어 마른 목을 축이는 그의 손에 벌겋게 피딱지가 앉아있다.

“아버지한테 잘 해라.” 한때 ‘똥파리’였을 것이나 지금은 어엿한 용역업체 사장이 된 고아 출신 만식(정만식)은 아버지에게 패악을 부리는 상훈을 타이르며 용돈도 건넨다. 하지만 돈 떼먹고 도망간 이, 장차 돈 떼먹고 도망갈 이들을 매일같이 쫓아다니는 상훈에게 지금 이 땅의 아버지들은 그렇게 말랑말랑한 대상이 아니다. 울부짖는 아이들 비명 소리를 일종의 배경음악으로, 피투성이가 된 채 짓이겨지는 엄마/아내 앞에서 가부장의 폭력적 승인을 남발하는 “이 놈의 나라 애비들은 모두 X같다”. “자기 가족들한테는 꼭 김일성이처럼 굴려고 그러”는 것이다. 그러니 화해는커녕 “할 수만 있다면 내 피를 전부 뽑아 아버지에게 마셔버리게 하고 싶다.”

‘똥파리’에게 허락된 팍팍한 길바닥에서 역시나 주먹을 교환하며 만난 여고생 연희(김꽃비)와의 만남은 오랜 장마 끝 햇살 같다. 연희와 함께라면 배 다른 누나 현서(이승연)와 머리 맞대고 밥을 먹는 것도, 어린 조카 형인(김희수)과 거리를 쏘다니며 즐겁게 웃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연희 또한 베트남전에 다녀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아버지(최용민)가 걸핏하면 죽은 엄마에 대한 끔찍한 혐오를 내뱉으며 뒤집는 밥상을 묵묵히 치운다. 아버지를 꼭 닮은 남동생 영재(이환)의 폭력 위협에 수시로 노출되는 그에게도 삶은 암울할 뿐이다.

세상 어떤 것도 두려울 것 없다는 듯 막 나가는 상훈이지만 정작 그는 두렵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칼에 찔린 여동생을 업고 달렸던 상훈은 형인을 내심 살뜰히 챙기면서도 ‘삼촌’으로 불리는 걸 질색한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딱한 조카와 유사 아버지 관계로 엮이는 걸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연희와의 관계가 유사 남매의 자리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조심스레 상처를 드러내고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지만, 아버지의 자리 혹은 남편의 자리가 예정될 수 있다는 점에서 로맨스는 그에게 선택불가의 지점에 있다. 그만큼 아버지-남편인 남성 가부장에 대한 트라우마, 증오는 뿌리 깊다.

어떠한 화해의 여지도 없이 파국의 진경을 펼쳐 보이는 <똥파리>의 가차 없는 엔딩이 가혹한 것은 지금 이 곳에서 불가능한 화해가, 미래조차 허락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상훈의 아버지, 이복 누나, 만식이 함께 하는 새로운 유사가족의 이미지는 자칫 화해 제스처라는 착시를 불러일으킬 만하다. 하지만 식당에서 나온 연희가, 야구방망이를 들고 폭력을 행사하던 용역 업체원 동생 영재를 발견하는 장면, 그리고 영재와 죽은 상훈의 모습이 되풀이 교차되는 장면은 뫼비우스 띠처럼 맞물린 폭력의 계승과 확산이라는 우리 사회 비극성을 구조적 모순으로 통찰해낸다. 피와 권력에 굶주린 영재의 눈빛이 상훈보다 더한 날 비린내를 풍길 때 <똥파리>의 진단은 더없이 비관적이며 어떤 전망도 보이지 않는다.

<더 저지>에서 죽음이라는 물리적 종착지에 겨우 다다라 뒤늦게 이루어지는 부자간의 화해는 권력의 이동에 따른 논리적 귀결이기도 하다. 행크의 말을 빌면 ‘후미진 동네 공무원’으로 보낸 ‘42년 세월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던 조셉 판사의 마지막 결정은 결국 아들에 의해 무시된다. 말기 암 공격에 취약해진 늙은 병자이자, 1급 살인범 기소 위기에 놓인 아버지는 모든 권력을 빼앗겨버린 철저한 약자의 자리에서 ‘아버지가 세상을 결정하는 방식에 넌더리 난’ 아들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아버지가 강자일 때 불가능했던 화해는, 아버지의 인정과 지지를 갈구했던 약자 아들이 강자의 자리로 이동한 뒤에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똥파리>에서 그나마 관습적인 화해가 불가능했던 건, 경제적 궁핍의 세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훈이 물리적 폭력 말고는 아버지의 권력을 전복시킬 어떠한 힘도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억압하고 핍박했던 강자의 자리를 탈환한 후에 아버지의 죄과를 용서하는 가진 자의 여유는 그에게 끝내 허락되지 않았다. 이제는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늙고 힘 빠진 전과자에게 자신과 어린 여동생, 그리고 어머니에게 향했던 그의 무자비했던 폭력을 고스란히 되돌려주는 지루한 반복 속에서 상훈은 극심한 자기 환멸에 빠질 뿐이었다.

‘살부(殺父)’의 기획마저 불가능한 <똥파리>가 요약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화해는 없다. 최소한 지금 이 땅에서라면, 앞으로도 화해 따위는 없을 것이다’의 비관과 냉담은 아프다. ‘아버지’와 ‘판사’의 정체성을 질문하는 <더 저지>의 균형감 같은 건 사치로 느껴질 만큼 긴급하고 절박한 것이다. 그 때문에 <더 저지>에서 행크에게 허락됐던 20년 전 연인과의 로맨스는 같은 상처로 고통 받는 연희와 상훈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빈민계층에서 자라난 가정폭력의 피해자, 가부장을 증오하는 미래의 가부장으로서 상훈과 영재가 상처받은 아들들의 연대를 꿈꾸는 것도 불가능했다. 어떠한 가능성도 타진하지 못한 채 이 땅의 아들들은 폭력에 잠식되는 괴물이 되거나, 차가운 시체로 바닥을 구른다.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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