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했던 삶의 시간을 증언하다

제주 출신의 고희영 감독이 만든 <물숨>(2016)은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제주해녀문화를 7년 동안 관찰한 다큐멘터리다. 김혜정 감독이 4년의 시간을 공들인 다큐멘터리 <왕자가 된 소녀들>(2011)은 1950년대 전성기를 구가했던 여성국극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한국 고유의 생활문화거나 문화적 자산으로서 소중한 가치를 가졌는데도 정작 우리들에게 너무나 낯설었던 제주의 해녀문화와 여성국극의 역사는 두 편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망각의 어두운 터널로부터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주 출신이지만 일찌감치 뭍으로 떠났었던 <물숨>의 고희영 감독은 마흔 넘어 암 진단을 받고 돌아온 고향 제주에서 비로소 해녀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제야 궁금해졌다고 한다. ‘어떻게 두려움 없이 무덤이 될 수도 있는 저 바다로 뛰어들까...’ 뭍에서 찾아온 이도 아닌데, 제주 사투리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섬 출신 감독마저 “카메라를 부숴버리겠다”며 완강히 거부하는 해녀들 주변을 2년째 맴돌다가 끝내 <물숨>의 제작으로 이어진 7년과, 후반 작업에 쓰인 2년의 세월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 시간의 힘으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의 제목 ‘물숨’은 얼핏 안다고 생각했으나 전혀 알지 못했던 해녀들의 삶을 단적으로 요약한다. 해녀들의 세계는 먼 바다로 갈수록 값비싼 해산물을 채취할 수 있지만 사고 위험 또한 높아지는 상군으로부터 중군, 하군으로 나뉘는 계급구조를 갖는다. 아무리 노력하고, 타협을 통해서도 절대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이 계급을 결정하는 것은 각자 타고난 ‘숨’의 길이이다. 자신에게 허락된 숨만큼만 물질하고 수면 위로 떠올라야 하는데, 남보다 조금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이 숨을 넘어서는 욕망 앞에서 먹게 되는 숨이 바로 물숨이다. 바로 그때 해녀들은 더 이상 숨의 세계로 돌아오지 못한다.

그래서 “물숨을 조심하라”는 말은 선배 해녀들이 가장 먼저 물질을 가르치면서 하는 말이면서 일종의 금기어가 된다. 제주 해녀들의 삶은 그렇게 바다에서 올라와 멈췄던 숨을 내뱉는 삶의 숨-‘숨비’(영화 제작사의 이름이기도 하다)와, 절대 경계해야 하는 죽음의 숨-‘물숨’의 사이에 놓여있다. 그래서 ‘저승에서 돈 벌어 이승에서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물숨>은 삶과 이웃한 죽음에 대한 깊은 사유를 끌어낸다. “해녀로 산다는 것은 살기 위해 들어간 바다가 무덤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물숨>에는 많은 죽음이 있다. 소문으로, 라디오 뉴스로 전해 듣거나 혹은 눈앞에서 동료 해녀가 상어에게 먹히는 참상을 목격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다음 날 아침, 가족과 동료들을 보낸 바다로 해녀들은 다시 들어간다. 열여덟 살 딸이 미역에 발이 엉켜 떠오르지 못했던 그 바다에 수시로 들어갔던 여든 여섯 된 엄마는 아직도 물질을 한다. “가고 싶지. 바다가 가까운 곳에 있으니까 물질하는 거 보면, 숨비소리 나면 가슴이 출렁출렁해. 가고 싶기만 해.” 고요할 때는 숨비소리가 듣고 싶어진다며 여든 둘의 나이에도 물질을 고집하는 엄마를 아들은 만류하지 못했고, 바다에 나갔던 고창선 해녀는 물숨을 이기지 못했다. 땅에서 제대로 걸음조차 옮기기 힘든 병든 노인으로서가 아니라, 바다에서만큼은 ‘바다의 여인’이었던 해녀의 마지막이었다.

삶과 죽음의 위태로운 경계를 오가는 해녀들의 삶에 대한 경외감으로 <물숨>은 조심스레 증언한다. “삶인지 죽음인지” 분간조차 어려웠던 혹독한 시간에도 “마음이 괴로울 때 바다에 가면 슬픔을 잊어버릴 때도 있는 물의 힘”에 의지해 그렇게 의연히 이어져온 삶의 숭고함을 일깨우는 것이다. 남편이자 신이었던 바다는 생명보다 더 귀한 존재였기에, “환생해도 또 해녀가 되고 싶”고, “살아있는 동안은 바다가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그래서 “열 살에 시작해서 여든 다섯 넘어서 물질하지만 단 하루도 바다가 싫었던 적이 없었”던 해녀들의 삶은 약동하는 생의 의지로 빛난다.

 

“요새 뭐 오빠 부대 그런 건 댈 게 아니야. 전부 혈서야.” “관객이 구름처럼 몰려와 자루에 돈을 쓸어 담고 발로 밟던 때였어.” 김혜정 감독의 다큐멘터리 <왕자가 된 소녀들>에서 여성국극에 대해 듣게 되는 한마디 한마디는 실로 놀랍다. 극 내의 남녀노소 역할을 모든 여성들이 담당하는 여성국극은 판소리 등의 국악과 창극이라는 전통문화를 기반으로 하며, 1948년 결성한 여성국악동호회의 ‘옥중화’를 효시로 한다. 1949년 ‘햇님달님’의 성공 이후 1950년대 가장 핫한 문화 아이콘으로 떠올랐으며, 특히 전쟁으로 상처받은 대중들을 위로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흥미진진한 소재를 지금까지 모르고 살았지?” 다큐멘터리를 본 많은 관객들이 가질 법한 의문을, 여성국극에 관한 사진 한 장을 접했던 2007년 당시 김혜정 감독도 갖게 되었고 이는 <왕자가 된 소녀들>이라는 영화 제작으로 이어졌다. 1950년대 무대예술의 황금기를 연출하고 대중예술의 총아로 부상했으나, 1960년대 영화나 텔레비전 등 새로운 미디어의 발달과 1970년대 군사정권의 전통문화 육성 정책에서 소외되면서 급격히 몰락했던 문화사가 뒤늦게 망각의 베일을 벗고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왕자가 된 소녀들>은 낡은 흑백사진이나 열악한 화질의 공연 영상, 관련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잊혀진 여성국극의 역사를 복원하는 한편 지금도 여성국극보존회의 이름으로 모임을 갖고 공연을 계속하는 여성국극인들의 생활을 밀착해서 보여준다. 열성 팬과 가상 결혼식마저 올린 최고의 남장배우였던 1930년생의 조금앵 선생, 서울특별시 판소리 무형 문화재 32호 판소리 흥보가 보유자인 이옥천 선생, 중요 무형문화재 79호 발탈보유자인 조영숙 선생 등 한 때를 풍미했던 이들은 노년의 나이에도 여전히 강력한 개성과 카리스마로 무대를 장악하고 관객을 압도한다.

흥미로운 것은 여성국극인들의 예술세계를 사랑하고 지지하는 중노년의 팬들이 단단한 결속력으로 구축한 문화예술 공동체가 보여주는 강인한 생명력이다. 공부도 결혼도 싫다며 국극단을 따라나섰던 젊은 처자들은 할머니가 돼서도 국극단의 세계를 떠받치는 중요한 동력으로 경쾌한 삶의 활력과 중단 없는 예술적 추구를 뒷받침한다. 남성보다 더 강하고 매력적인 남성상을 연기했던 여성단원들과 이들에 호응했던 여성 팬덤은 한국의 연희문화사, 대중문화사에 홀연히 빛나는 존재들로 강하게 뇌리에 남는다.

여성국극은 1970년대 정부에 의해 주도된 전통문화보존 정책 와중에 철저히 외면당하고 배제됐다. 왕자를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왕자가 됐던 이들이 만든 공동체의 해방적 에너지는 ‘천편일률적 레퍼토리, 얼치기 형식, 현란한 형식으로 관객을 속이는’, ‘창극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매도됐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자유롭게 연기하고 유연하게 교환함으로써 성정체성의 고정된 틀을 아찔하게 교란시켰던 ‘가장 퀴어하고 파워풀한 역사’는 그렇게 너무 일찍 우리에게 왔다가 사라져버렸다. 2000년대 이후 여성주의 문화연구자 및 집단들이 여성국극을 주목한 이유, 또 다른 <왕자가 된 소녀들>이 만들어져야 하는 이유다.

<물숨>과 <왕자가 된 소녀들>은 천한 직업이라는 멸시와 하대의 상처로 인해 외부세계에 드러내기를 꺼렸던 폐쇄적인 노동 및 생활공동체 제주 해녀문화와, 내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급격히 몰락하게 된 여성국극을 망각으로부터 불러낸다. 특히 죽음의 공포와 배제의 위협 앞에서도 당당하게 버텨온 강인한 생명력, 강력한 존재감으로 관객을 매료시키는 ‘그녀들의 이야기-Herstory’는 해녀문화에 대한 민속지적 관찰이나 새로운 국악사 쓰기의 의미에 더해 남성 중심적인 공식 역사가 외면했던 여성사를 복원한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물숨>의 카메라 앞에서 살아온 시간을 증언하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은 최고령인 88세 현숙직 해녀를 비롯, 대부분 여든 줄에 들어선 노년의 해녀들이다. <왕자가 된 소녀들>이 만들어진 다음 해 82세로 사망한 고 조금앵선생과 함께 춤추고 노래했던 배우들도 거의 일흔 줄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있다. 나이든 노년, 특히 여성의 얼굴은-제주해녀들과 여성국극이 그러했듯-한국 영화에서 부재하는 것이거나 소멸과 쇠락의 서글픈 상징으로 전형적으로 타자화돼 왔다. 두 영화에서 자신의 삶과 공동체의 역사를 말하며 숭고한 삶을 증언하는 여성들의 몸과 주름진 얼굴 클로즈업은 그러한 전형화된 이미지를 배반하는 쾌감을 안긴다.

평생에 걸친 바다와의 사투는 고단함의 연속이었겠지만 주름진 해녀들의 얼굴이 북돋우는 강렬한 삶의 의지가 있어 <물숨>은 회한과 비탄을 멈춘다. 90도로 꺾인 허리에 유모차를 밀며 힘겹게 걸음을 옮기던 늙은 해녀의 신체는 바다 속에서 날렵하고 강인한 전사의 것으로 되살아나고, 바다에 대한 깊은 경외감과 간절한 그리움을 말하며 “딱 제 숨만큼만” 사는 지혜를 가르치는 인생의 큰 스승들로 해녀들은 각인된다. <왕자가 된 소녀들>에서 온갖 병치레에 시달리던 70, 80대 배우들도 언제 아팠냐는 듯이 꼿꼿이 서서 우렁찬 목소리로 창을 하고 춤을 춘다. 그렇게 여성국극의 역사 또한 소외당하고 배척당한 피해자의 것이 아닌, 활력과 매혹의 강렬한 쾌감으로 기억된다.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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