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생각하며>

들쥐근성

 

 -레밍이라는 말 한마디로
   호된 대가를 치른 도의원.
  그러기에 옛날 어른들은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라고
   말을 조심하라 일렀습니다-

 

최악의 집중폭우로 물난리가 난 지역을 외면하고 해외연수에 나선 충청북도의회 의원이 국민적 비난이 쏟아지자 “레밍 같다”는 발언을 했다가 그러잖아도 무더운 삼복더위에 온 국민을 더더욱 열 받게 했습니다.

1980년 초 일부 군부세력의 음모 속에 5 공화국이 태동할 무렵 미국의 상하 양원은 한국의 비상상황에 관한 청문회를 열었습니다.

몇 달 전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피살된 뒤 권력의 공백상태가 된 틈을 노려 전두환 소장 등 일부 정치군인들이 12·12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자 긴급히 소집된 한국관계 회의였습니다.

청문회는 주한 미군 사령관 존 위컴 대장을 한국에서 소환해 참석시킨 가운데 질의응답을 벌였습니다. 한 의원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전두환 소장이 지도자가 될 경우 한국 국민들이 과연 그를 인정하고 따를 것인가?”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치적인 능력도 미지수인 그를 국민들이 용인할 것 같으냐는 질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위컴은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습니다. “물론 그는 육군 소장에 불과하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은 ‘레밍의 근성’을 갖고 있으므로 누가 지도자가 되던 권력을 잡은 사람을 따르게 돼 있다”며 “한국은 아직 민주주의를 하기 에는 맞지 않다”고 답변했습니다. 청문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반신반의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고 미국 언론들은 전했습니다.

한국인의 국민성을 ‘레밍’에 비유한 이 유명한 증언은 언론 검열로 우리나라에서는 보도되지 않았지만 가톨릭 신부들에 의해 국내에 전해짐으로써 양식 있는 지식인들의 분노를 샀습니다.

‘레밍’발언으로 일약 국민적 ‘스타’가 된 김학철도의원이 기자들에 둘러 싸여있다. /Newsis

위컴이 예로 든 레밍(lemming)은 비단 털 쥐 과에 속하는 설치류(齧齒類)의 일종으로 북극에 서식하는 작은 ‘들쥐’를 말합니다. 몸길이 13~15cm에 0.5~1.9cm의 짧은 꼬리를 가진 이 들쥐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노르웨이, 북아메리카, 유라시아 툰드라 지역에 많이 서식하며 겁이 많고 소심한 것이 특징으로 힘센 놈이 맨 앞장을 서면 그 뒤를 따라 수천, 수 만 마리가 한꺼번에 광활한 들판을 몰려다녀 일명 ‘나그네 쥐’라고도 불립니다.

이 들쥐들은 번식력이 유별나게 강해 몇 년 주기로 그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때로는 수백만 마리씩이나 무리를 짓곤 합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이들 들쥐들은 직선으로만 이동하고 절벽에 다다르면 한꺼번에 바다로 뛰어내려 집단자살을 한다는 점입니다.

레밍들의 집단자살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확인이 안 되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레밍은 본래 눈이 근시라서 바다에 다다르면 쉽게 헤엄쳐 건널 수 있는 작은 강으로 착각해 뛰어들어 죽는다”는 주장을 하는가 하면 ‘개미’의 작가인 프랑스의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레밍은 개체수가 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습성이 있는데 지각변동으로 인해 대륙이 갈라져 절벽이 생겼지만 타고난 유전자 지도대로 조상의 길을 따라가다가 재앙을 맞는 것”이라고 색다른 분석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위키백과)

위컴의 청문회 증언 골자는 “한국인의 국민성은 상대가 누구이던 권력을 가진 사람이면 굴종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어 민주주의를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괘씸하기 짝이 없는 고약한 발언입니다.

물론 위컴이 한국인을 얕잡아 보고 일부러 말을 만든 것은 아닐지 모릅니다. 더욱이 그가 인용한 레밍은 단지 힘센 놈을 맹목적으로 따라갈 뿐이지, 나쁜 동물도 아닙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집쥐든, 들쥐든 쥐를 좋은 동물로 보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곳간의 곡식을 축내고 들녘의 농산물을 갉아먹을 뿐 아니라 집안을 잽싸게 옮겨 다니며 음식물을 훔쳐 먹는 버릇이 있어 약삭빠른 사람을 비하할 때 ‘쥐새끼’라고 표현하는 등 나쁜 인상을 갖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면 위컴은 아무 근거도 없이 ‘한국인은 레밍’이라고 말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한국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졌을 것이고 특히 어두운 우리 현대사를 꿰뚫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일부 정치군인들이 탱크를 몰고 쿠데타를 일으켜 합법적인 정부를 무너뜨리고 군사독재를 일삼아도 순종하기만 했던 5·16을 그가 몰랐을 리 없을 것입니다.

이제 이야기지만 전두환 소장이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이 되자 어떤 도지사는 “민족의 태양이 떠올랐다”고 환호작약(歡呼雀躍)했고 많은 사람들이 굶주린 들개들처럼 ‘평생동지’를 합창하며 ‘전두환 각하’에게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바쳤습니다. 위컴의 증언은 놀랍게도 적중했고 5, 6공 그 군사정권은 1993년 2월까지 13년 동안 지속됐습니다.

권력 앞에 굴종하는 것은 약한 인간의 속성입니다. 그렇다고 군인들이 탱크를 몰고 나온다고 어느 선진국에서 그것이 통하고 먹히겠습니까.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어느 나라 국민들이 박수치고 환영하겠습니까. 턱도 없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위컴은 그것을 말한 것입니다.

지난겨울 우리 국민들은 연 인원 1700만 명이 촛불을 들고 평화시위를 벌여 부도덕하고 무능한 정권에 철퇴를 가했습니다. 그 사건으로 전 세계는 한국 국민의 높은 정치 수준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들로부터 신뢰를 받는 것은 국민소득이 얼마이고, 핵무기를 가졌다고 해서가 아니라 국민이 얼마나 깨어있고 도덕성을 갖고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들쥐 소리를 듣느냐, 듣지 않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 국민의 의식에 달려있습니다.

한 지방의원의 사려 깊지 못한 발언 때문에 온 나라가 소란한 것을 보면서 “말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해 보게 됩니다. 입이 ‘방정’입니다.

저작권자 © 충청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