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말하는가, 누가 보이는가…

아이는 종종 무구한 관찰자 역할로 불려와 영화의 문을 연다. 대개 소년의 몸을 갖는 그 아이에게는 무언가를 발견하는 역할이 주어지는데,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에서 메뚜기를 잡던 까까머리 소년은 황금빛 들녘에 감춰진 핏빛 죽음을 파헤칠 주인공 형사를 관객에게 소개한다. 이창동 감독의 <시>(2009)에서도 여름날, 조용히 흐르는 강 옆에서 어린 소년들이 놀고 있다. 놀이에 열중한 친구들에게서 혼자 떨어져 나온 소년이 강물에 떠내려 오는 시커먼 무언가를 발견한다.

두컴컴한 농수로에서 박두만 형사(송강호)가 본 건, 개미들에 까맣게 뒤덮인 여성의 벌거벗은 몸이었다. 손은 뒤로 묶여있고, 맨 다리에는 메뚜기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유사한 방식으로 살해되고 버려진 여성의 사체가 또 발견된다. 1986년부터 1991년까지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일대에서 10명의 여성이 차례로 살해되었으나 범인이 잡히지 않은 미해결 살인사건, 즉 ‘화성연쇄살인사건’은 김광림의 희곡 <날 보러와요>(1996)의 소재가 됐고, 봉준호는 이를 <살인의 추억>으로 영화화했다.

황금빛 들녘을 배경으로 잇달아 여성들의 사체가 발견되는 <살인의 추억>은 유사한 플롯을 갖는 할리우드의 스릴러 장르 혹은 범죄 수사물과 닮았으면서도 많이 다르다. FBI나 CSI 등 범죄 담당 기관의 요원들이 전문가 특유의 포스를 뽐내며 당당하게 등장하는 것과 달리, <살인의 추억> 속 형사들은 어딘가 많이 어설프고 허둥댄다. 구희봉 반장(변희봉)은 논두렁을 구르며 등장하고, 독수리타법으로 타자를 치는 박형사도 차라리 깡패가 어울릴까, 아무리 좋게 봐도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할 깜냥은 아닌 듯싶다.

깔끔하게 폴리스 라인 설치되고 사람들이 효율적으로 통제되는 스릴러 영화 속 범죄현장과 달리 감식반도 제때 안 오고, 제보자도 없이 ‘현장 보존이 개판’인 사건 현장의 풍경 또한 거북살스럽다. ‘중요한 거니까 손대면 안 되는’ 피해자의 팬티, 브래지어 등이 동네 아이들의 장난감, 놀이도구가 되어 이리저리 나뒹굴고, 마을 주민과 아이들이 한데 어울린 풍경은 오일장을 방불케 한다. 그나마 남은 유일한 증거인 운동화 족적마저 경운기가 뭉개고 지나가면, 멀쩡한 사람 운동화로 다시 족적을 만드는 그곳의 풍경을 위해 ‘농촌스릴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희한하면서도 매우 ‘한국적’인 특수성을 반영한 장르명이 아닐 수 없다.

사람 좋지만 무능한 구반장 대신 신동철 반장(송재호)과, 서류를 신봉하는 나름 합리적인 서울 형사 서태윤(김상경)이 합류하지만 사건은 계속 제자리를 맴돈다. ‘미치도록 범인을 잡고 싶었’던 형사들은 결국 범인도 잡지 못하고 불구자가 되거나, ‘미친 놈’처럼 변해간다. 유전자 감식을 위해 샘플을 미국으로 보내고 하염없이 결과를 기다려야 했던 때였다. <살인의 추억>은 연쇄살인사건이라는 너무 일찍 찾아온 현대적 범죄에 대응하는 한국사회, 특히 공권력 집단의 무능과 비합리를 통렬하게 꼬집는다. 그리고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온 경찰병력이 시위대를 진압하고 색출하기 위해 동원됐던 80년대의 정치적 상황을 잇단 죽음의 가장 핵심적인 귀책사유로 제시한다.

그렇게 빨간 옷을 입은 채, 주로 빗속에서 스러진 채 차갑게 식어가야 했던 숱한 여성들은 1980년대적 상황이 만든 희생양이 된다. 무능하고 폭력적이었던 과거 독재정권이 압살했던 민주주의적 가치, 인간적 존엄의 상실과 부재를 함의하는 상징이 되기도 한다. 여성의 사체를 정치적 은유의 제단에 바치는 <살인의 추억>의 화법은 실제로 상처 투성이 과거를 분노로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적잖은 지지를 얻었다. 그 와중에 어둠 속에서 죽어간 그녀들, 그녀들의 부재를 슬픔으로 간직한 채 남은 삶을 살아간 이들, 그리고 ‘그녀들과 그녀들의 부재에 따른 슬픔’이 부재하는 영화를 의아해하는 이들은 잊혀졌다.

 

무늬 재킷에 흰색 모자를 쓴 멋쟁이 할머니 미자(윤정희)는 병원 대기실에서 아이를 잃고 오열하는 팔레스타인 여성에 관한 보도를 ‘본다’. 다소 무료한 듯 텔레비전 화면에서 시선을 돌렸던 그녀는 병원 영안실을 지나다가 또 자식을 잃고 오열하는 엄마(박명신)를 ‘본다’. “야, 너 어디 갔어, 너 그렇게 가면 안 되잖아”, 정신을 놓은 채 중얼거리는 맨발의 젊은 엄마 곁에서 쉽게 떠나지 못했던 그녀는 다른 이들에게 자신이 본 이야기를 하지만,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한다.

이창동의 <시>에서 주인공 미자는 참척의 고통에 빠진 엄마를 모두 세 번 보게 된다. 이역만리 떨어진 팔레스타인 엄마의 고통은 텔레비전 화면 속 이미지와 관람자의 거리만큼 개별 컷으로 분리된다. ‘다리 위 투신한, 서중학교 다니는 여중생’의 엄마를 처음으로 눈앞에서 보는 미자의 모습은 컷으로 나뉘지 않고 하나의 장면에 담기는 롱 테이크로 찍힌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미자는 알지 못했다. 그저 안타깝고 딱한 ‘누군가’의 슬픔에 자신이 강력하게 연루되고 개입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임을.

<살인의 추억>에서 박보희 등 여성들의 죽음을 접한 인물들, 남자 형사들은 “누가 (그녀를) 죽였는가?”를 묻지만, <시>의 미자는 다른 질문을 한다. “걔가 어떤 앤지, 앞길이 구만리 같은 애가 왜 자살했는지”를 궁금해 한다. 그리고 그 질문으로부터 영원히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밥벌이에 바쁜 부산의 딸을 대신해 애지중지 키웠던 손자 종욱(이다윗)이 그 소녀를 집단 성폭행하고 끝내 죽음으로 이끈 여섯 명의 가해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다섯 명 가해자들의 부모는 “얼마씩 모으면 될까”, “어떻게 조용하게 일을 처리할까”를 물었지만, 미자만이 홀로 자신의 질문에 답을 찾는다.

시 쓰기 강좌에서 만난 김용탁 시인(김용택)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잘 봐야한다”면서 “사과라는 것을 알고 싶어서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 싶어서 보는 것이 진짜 보는 것이다. 진짜로 보게 되면 뭔가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시인의 말을 좇아 미자는 투신한 여중생 희진(한수영)을 ‘진짜로 보기 위해’ 위령미사가 열리는 성당과 학교 운동장, 과학 실습실, 자살한 다리와 희진의 집을 찾는다. 그리고 고통에 빠진 엄마를 세 번째로 ‘보’던 날, 땅을 일구며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희진의 엄마를 “만나러 가서 만나지도 못하고 그냥 온”다.

그렇게 반복된 세 번의 ‘보기’ 끝에 미자는 한 편의 시를 완성한다. 살아있는 모든 순간의 아름다움을 기억하고 남겨진 것들에 대한 따스한 위로를 담은 ‘아네스의 노래’의 낭송은 미자의 목소리로 시작되었다가 미자가 사라지고 희진의 삶의 공간으로 연결된 뒤, 처음 듣는 희진의 목소리로 이어진다. 자신도 알지 못한 채 벌어진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지 않은 미자는 소녀의 얼굴을 ‘진짜’, ‘제대로’, ‘잘’ 보기 위해 필사적으로 흔적을 찾았다. 그리고 미자의 몸을 매개로 돌아온 영혼의 목소리가 세상에 울려 퍼진다.

<살인의 추억>에서 박두만 형사는 용의자들의 “얼굴을 딱 보다보면 어느 순간 감이 딱 온다”고 직감을 자랑한다. 하지만 그의 ‘사람 보는 눈’은 엉망이었고, 끝내 범인은 잡히지 않는다. 그리고 허공을 맴돌던 그의 질문은 오랜 시간 뒤 다시 황금빛 들녘으로 돌아온다. ‘옛날에 자기가 했던 일이 생각나서 진짜 오랜만에 와 본’ 살인범처럼, 넉넉한 뱃살의 중년이 된 양복 차림의 박두만은 사체가 누워있던 어두컴컴한 농수로를 찾아 1989년 10월 23일의 얼굴로 다시 묻는다.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채 삭이지 못한 분노와 모골이 송연해지는 공포, 가슴이 먹먹해지는 회한을 담은 송강호의 얼굴 클로즈업은 ‘살인’도 ‘추억’도 모두 남자들의 것이었음을 최종적으로 확인한다. 어둡고 답답했던 시대, 무능력하고 어리석었던 남자들의 나라가 여자들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해 사체로 방치했었다고 자책한다. 하지만 '화성'으로부터 20년의 시간이 지난 <시>의 시간까지도 죽음은 계속되고, 여자들은 사체로 떠오른다. 그런 점에서 희진이 떨어졌고, 아마도 미자 또한 떨어졌을 다리 위에서 유령으로 돌아온 희진의 얼굴을 보여주는 <시>의 엔딩은 송강호의 얼굴 클로즈업으로 끝나는 <살인의 추억>의 엔딩과 정확히 맞대응한다.

<시>에서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머금은 희진의 시는, 농수로와 논바닥, 으슥한 산길에 널브러졌던 많은 여성들을 사체의 자리로부터 불러일으키는 초혼(招魂)의 노래가 된다. 시대의 희생양, 남성적 정체성의 통합을 위한 도구로서의 쓰임새를 취소하고, 삶을 노래하는 존재로서 그녀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다. 소년의 얼굴에서 시작돼 사체-여성의 얼굴/들을 탐구하고 클로즈업된 얼굴로 끝나는 ‘얼굴 로드무비’(봉준호 감독)로서 두 영화는 그렇게 같은 문으로 들어와 다른 문으로 나간다. “죽인 자는 누구인가”와 “죽임을 당한 자는 누구인가”의 다른 질문이 만든 이 차이는 우리가, 우리들이 즐겨보는 영화가 과연 무엇을 보여주었는가, 혹은 무엇을 보여주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남긴다.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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