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보지 말고 나아가기

때로는 미련으로, 혹은 아쉬움으로 가슴 한 구석을 차지하다가 돌아갈 수 없기에 더욱 간절한 소망으로 어느 결엔가 덩치를 키우기도 하는 게 바로 ‘과거’라는 애물이다. 없던 셈치고 잊을 수도, 그렇다고 언제까지 품에 안고 더딘 걸음을 내딛기도 마땅찮은 순간에 혹시 놓여있다면,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과거가 없는 남자>(2002)와, 이윤기의 2008년 작품 <멋진 하루>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어떻게 과거와 만날 것인가, 혹은 어떻게 과거와 헤어질 것인가를 알려주는 쏠쏠한 팁이 될지도 모르니까.

름도 생소한 핀란드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 <과거가 없는 남자>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어두운 밤, 혼자 기차를 타고 헬싱키 역에서 내린 중년의 남자(마르꾸 펠톨라)는 분명 한적한 공원 벤치에서 잠시 쉬다가 동네 불량배 무리에게 불의의 공격을 당하고, 병원으로 옮겨졌다가 사망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의사와 간호사가 모두 자리를 뜨자, 벌떡 일어난 남자가 붕대를 스스로 풀고 걸어 나온다. 그러다 다시 한적한 길가에 쓰러진 남자는 주변을 지나던 사람들에게 발견된다.

하지만 왜,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었느냐에 대한 궁금증은 곧 잊힌다. 더 큰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 시작하자마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 남자가 대체 누구인지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당사자조차도. 사고 당시 머리에 가해진 충격 덕분에 남자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가 없는 남자’로 살아간다. 입는 것, 먹는 것 하나 여유롭지 못한 가난한 동네 이웃들의 도움을 받아 다 버려진 컨테이너를 청소해서 살고, 구세군 무료 배식으로 연명하며, 구세군 복지센터에서 양복을 구하고, 쓰레기통에서 구한 세간을 고쳐 살림살이로 쓴다. 겨우 얻은 감자 세 알로는 정성껏 농사도 짓는다.

과거도 없고 이름도 없지만 할 수 있는 일은 많아서, 그는 연애도 한다. 생전 미소 한 번 지어본 적 없을 것 같은 남자만큼이나 무뚝뚝하고 굳은 얼굴의 구세군 장교 이루마(카티 오우티넨)와의 로맨스는 로맨스답게 달달하다. 콩 수프 한 접시, 겨우 수리한 낡은 주크박스가 함께 하는 낡은 컨테이너지만 정장 갖춘 악단이 연주하는 최고급 레스토랑 못잖다. 엄숙한 찬송가만 고집하다 주민들에게 외면 받던 구세군 악단은 그 덕분에 로큰롤 레퍼토리로 흥겨운 마을축제를 이끈다. 이만하면 집 있고, 돈 많고, 무엇보다도 번듯한 이름 가진 이들 부럽지 않은 삶이 아닌가.

하지만 드디어, 과거로부터 그를 호출하는 일이 생긴다. 이름이 없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던 남자는 우연히 공사현장을 지나다 용접하는 모습을 본다. 안 그래도 손이 거칠어 ‘많이 배운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 남자는 선뜻 해보겠다고 나서고, 예사롭지 않은 솜씨를 선보여 덜컥 취직이 된다. 그리고 월급 계좌를 만들기 위해 들른 동네 은행에서 뜻하지 않게 은행 강도 사건에 연루됐다가,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얼굴 덕분에 느닷없이 끊겼던 과거로 돌아가는 길을 찾게 된다. 먼 고향의 아내가 경찰을 통해 연락을 해온 것이다.

쉽게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리며 이루마와 애틋하게 작별한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이름을 찾는다. 하지만 ‘야코 루아넨’으로 살았던 과거와의 해후, 혹은 복원은 달갑지도, 감격스럽지도 않다. 용접 노동자였던 그는 슬롯 머신, 내기 당구, 포커 등 안 하는 게 없던 도박으로 좋아하는 음반도 다 팔아먹었고, 지루한 불화 끝에 아내와 이혼 절차에 들어갔던 불성실한 남자, 나쁜 남편이었다. 일 때문에 헬싱키로 떠난 그가 오랫동안 연락이 없자 이혼절차는 종료됐고, 이미 아내 곁에는 ‘야코 루아넨’보다 훨씬 따스하고 배려 깊은 남자가 함께 하고 있었다.

 

든 건 돈 때문이었다. 350만원! 겁나게 운 좋은 누군가에게는 옷 한 벌 값, 혹은 한 끼 식사 값이기도 할 그깟 돈 350만원 때문에 희수(전도연)는 병운(하정우)을 찾아간다. 차라리 단순한 채무관계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마는, 1년 전 헤어진 옛 연인들 간의 재회 사유로는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출정하는 장수의 심정으로 짙은 스모키 화장을 한 희수는 되도록 냉정하고 간단하게, 무엇보다도 신속하게 일을 해치우자고 결심한다. “돈 갚아!” 인사 같은 건 생략하고 딱 한 마디만 내지르고 입을 닫아버릴 작정이었건만, 역시나 일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상대가 병운인 한, 그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경마장에서 시간 죽이며 앉아있던 그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커다란 가방 메고 이 곳 저 곳 신세지는 유랑자 행세도 그렇고, 오만 일에 다 참견하는 오지랖에 어디서건 여전한 넉살이며 온 세상 여자들에게 눈웃음치는 설레발도 한결같다. 무엇보다도 350만원을 빌려갔던 형편이 그대로인지 혹은 더 나빠졌는지 하여간 현재 갖고 있는 돈도 없단다. 그러면서도 “다 방법이 있어. 오늘 안으로 해결된다고”, 큰 소리 치는 게 희수의 전 애인 병운이라는 사내다.

일본 작가 다이라 아즈코의 단편 소설을 각색한 <멋진 하루>는 하릴없이 병운을 따라나선 희수의 하루를 그린다. 옥상 골프를 즐기는 여성 CEO, 희수와 묘한 신경전을 벌인 호스티스, 주차 단속하는 스키교실 제자, 어린 딸 달린 이혼녀 등 다양한 여성들, 그리고 바이커족 사촌형 무리들을 만나며 잔돈푼을 빌리는 병운과 함께 서울 시내를 헤매고 다닌다. 그렇게 생전 만날 일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을 잇따라 만난 하루는 정말 길고도 기이했다. 마치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처럼, 한여름 밤의 소동극에 휘말린 사람처럼 희수는 당혹스럽고 불쾌하거나, 수시로 기가 막히고 언짢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보이는 게 다는 아니지”, “사는 게 다 그런 건가 봐요...”, “다 나름대로 아픔이 있는 거야”, 처음엔 입만 열면 나오는 뻔한 너스레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느 결엔가 “조금 단순한 건 사실인데 진심이 아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던 병운의 말에는 화가 나지도, 피식 헛웃음이 나지도 않는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 하루 동안 희수에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남들 사는 복잡다단한 사정 같은 게 눈에 들어온 것 같다. ‘좋게 보면 좋은 거고 나쁘게 보면 한없이 나빠 보인다’는 병운의 ‘편한 사고방식’이 정말 ’생각하기 나름‘의 지혜일 수도 있겠다는, 혹은 자신의 기억보다 그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같다.

두 사람이 즐겨 찾던 갈치조림 집은 닫았지만, 음식 나눠 먹는 걸 싫어하고 녹차를 즐겨 마시는 희수의 취향을 병운은 기억한다. 병운이 어떤 캔 커피를 좋아하는지 희수도 잊지 않았다. 병운이 늘 자신의 왼쪽에 서는 건, 희수가 그의 오른쪽 얼굴을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꼭 철천지원수 만난 표정‘으로 화가 나있던 희수의 얼굴에도 편안한 미소가 찾아올 즈음, 20만원 모자라는 330만원과 남은 34만 백원짜리 차용증을 끝으로 둘은 헤어진다. 그렇게 화면이 어두워진 뒤 “혼자 뭐하세요?...전부터 얘기하고 싶었는데...” 병운의 목소리와 함께 1년 전, 설렘으로 시작되던 첫 만남의 에필로그가 펼쳐진다.

“듣던 것보다 좋은 분이시군요”, “부탁이 있다면, 부디 잘 대해주시오.” 우여곡절 끝에 과거를 되찾은 남자와, 그 남자와 이혼한 여자를 지금 사랑하는 남자는 정중하고도 예의 바르게 인사를 교환한다. 한때 애증의 시간을 보냈던 남자와 그의 전 아내도 조심스레 서로를 포옹하며 말없는 이별을 나눈다. <과거가 없는 남자>에서 과거와 만나고 이별하는 순간은 그렇게 침묵 속에, 최소의 움직임 속에 지나간다. 그리고 남자는 ’좋은 사람‘으로서 자신의 현재를 입증해 줄 사랑하는 연인 이루마에게로 한달음에 달려온다. 도박하던 손이 아니라 물건을 고치고 새로 만들고 사람들을 감싸는 손으로 살아갈 새로운 삶을 위해서.

헤어진 뒤 1년. 각각 다른 사람을 만났다가 우여곡절 끝에 헤어졌고, 결코 유쾌하지 않은 사정으로 재회했던 희수와 병운의 깜짝 데이트는 파란만장했다. 그리고 편안한 인사와 함께 평화롭게 끝난다. 능글맞게 눙치던 그의 말처럼 ’다른 이유‘가 있어서 병운을 찾아온 건 아니었다. 하지만 희수의 차와 버스, 지하철을 갈아타고 혹은 걸음을 재촉하며 함께 걸었던 것은 어쩌면 과거로, 1년 전의 첫 출발을 향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에게 급전을 내주던 많은 여자들처럼 병운을 ’좋은 남자‘,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정도, 딱 그 정도가 그날 ’둘이 함께 해낼 수 있는‘ 마지막 목표가 될 뿐. 그래서 깜깜한 밤, 양 손에 커다란 가방을 든 채 음료 시음회장을 맴도는 병운을 두고 희수의 차는 그냥 떠난다. 핸들을 잡은 희수의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이 퍼져간다.

현재의 고통을 해석하기 위해, 혹은 현재의 곤란을 해소하기 위해 과거로 돌아갔을 때 과거와 손잡을 것인가, 과거에 등을 돌릴 것인가. 지하철역에 병운을 내려준 희수는 차를 금방 출발시키지 않고 멀리 병운을 지켜본다. 하지만 선택의 기로에서 머뭇거린 시간은 길지 않았고, <멋진 하루>는 <과거가 없는 남자>와 같은 선택을 한다. 과거는 과거대로 놓아두기. 그렇다면 <과거가 없는 남자> 도입부에서 설명되지 않던 남자의 ’부활‘도 그런 의미이지 않을까. 오랜 버퍼링으로 버벅대는 컴퓨터를 다시 셋업시키듯 아예 원점으로부터 새롭게 출발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죽음으로부터 삶으로 건너뛰듯 과감하고도 ’초월적으로‘ 과거와 단절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설득시키는 것이다.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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