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끝내, 돌아오지 못한다

프랑수아 오종의 <사랑의 추억>에서 사라진 남편처럼, 누군가의 실종이라는 소재는 많은 영화들에서 효과적으로 쓰인다. 일상을 뒤흔드는 충격으로 극적 긴장감을 주기도 하고, 아무런 준비 없이 남겨진 이의 공허한 일상을 통해 상실의 긴 그림자를 보여주기도 한다. 특히 최근 한국의 스릴러물은 사라진 누군가를 찾는 긴박한 달음박질과 거친 호흡에 매료돼있다. 그 가운데 여성감독들이 만든 두 영화, 변영주의 <화차>(2012)와 이언희의 <미씽 : 사라진 여자>(2016)는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는 동시에 또한 일그러뜨리는 공통점과 차이점으로 눈길을 끈다.

본 버블경제 시기를 배경으로 한 미야베 미유키의 추리 소설을 각색한 변영주의 <화차>에서 주인공 문호역을 맡은 이선균은 항상 신경이 곤두선 채로 조바심을 내고, 버럭 소리를 지른다. 다른 인물들의 감정에 비해 두어 단계쯤 높아 보이는 그 팽팽한 긴장은 보기에 피로감을 줄 정도이나,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결혼식을 한 달 앞둔 약혼녀(김민희)가 감쪽같이 사라졌는데 도무지 이유를 짐작할 수도, 흔적을 찾을 수도 없다. 게다가 ‘선영’이라는 이름마저 가짜였다니, “그러니까, 얘가 나랑 결혼할 여잔데, 얘가 누군지 모른다고, 지금!” 버럭 소리 지르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할 일이다.

자신을 속였던 약혼녀를 쉽게 포기했던 원작소설에서의 남자와 달리 문호는 선영을 깊이 사랑하고, 이는 퇴직형사인 사촌형 종근(조성하)의 전문가적 냉철함을 압도하며 이야기를 이끄는 동력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로 인해 영화 <화차>는 원작소설과 다른 길을 간다. 거짓으로 자신을 방어한 채 철저한 타인으로 살아야했던 여성의 진실은, 어떻게든 그 여성을 껴안아주고픈 남자의 간절한 소망을 바탕으로 규명된다. 어쩌면 살인자일 수도 있을, ‘애초에 우리하고는 인간 종류가 다를’ 인물의 경악을 금치 못하는 악행이, 궁지에 몰린 나비의 연약한 날갯짓으로 연민을 일으키며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점에서 <화차>가 택한 멜로드라마적 효과는 과연 탁월하다.

그런데 다소 성급하게 말하자면, 영화 <화차>의 이러한 선택은 적잖은 아쉬움을 남긴다. 슬립 차림의 가녀린 배우 김민희가 이선균과 조성하의 거대한 얼굴에 포위된 듯한 구도의 포스터가 시사하는 것처럼, 남성 탐정-조사자의 시선을 토대로 규명된 경선/선영의 정체성은 가혹한 운명에 희생된 동정과 연민의 대상으로 축소된다. 그럴 때 화려한 쇼핑몰 끝까지 맨발로 내달렸던 여성의 ‘상승’ 혹은 ‘생존’ 욕망과, 끝내 땅으로 안전하게 내려오기를 거부당한 처참한 ‘추락’에 대한 구조적인 접근과 집요한 질문은 넘쳐나는 멜로드라마적 파토스에 압도된다.

하지만 사랑하는 남자의 품에서 눈물 흘리던, ‘그럼에도 그가 사랑했던 여자’라는 결말로 수렴되지 않을 진실의 조각들이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과연 그녀는 누구인가/였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경선’이 ‘선영’을 거쳐 ‘임정애’ 혹은 ‘호두엄마’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를 준비하던 삶의 궤적은 단 한 번의 실수나 불운에도 추락이 불가피한 ‘낭떠러지 위의 삶’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가구공장 운영을 위한 대출이 악성 사채로 돌아와 온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단돈 35만원의 카드 값이 8천만 원의 거대한 채무로 돌아오는 파멸의 폐쇄회로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운 현실을 그려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여자를 잃은 남자의 절규로 끝나는 영화에서 더 규명되고 들어야 하는 이야기가 남는다.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던 경선에게 먹잇감으로 포착됐던, ‘엄마도 사고로 죽어버리고 가까운 친구도 없던’ 강선영과,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시고 우울증 치료로 힘들어 하’는 호두 엄마는 어쩌면 현재도 불우하달 수 있는 종근이나, ‘똑똑하고 직장도 좋은’ 문호의 미래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세상에서 사람이 없어졌는데 그걸 아무도 몰랐다는 게 더 무서운 세상’에서 누구라도 경선/선영처럼 ‘더 이상 갈 데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수 있으며, ‘지금 당장 없어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경선/선영의 추락이 안겨준 전율의 숨겨진 진실이 돼야 하는 것이다.

 

화 <미씽: 사라진 여자>의 오프닝은 모성이 놓여있는 현실의 리얼리티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전화 목소리, 급하게 현관 디지털 키를 누르는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영화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방으로 달려가 컴퓨터 책상에 앉는 지선(엄지원)을 보여준다. 보도자료 작성에 여념이 없을 때 방문이 열리고 사랑스러운 어린 딸 다은이 기어오지만 눈 맞출 여유도 없이 보모인 한매(공효진)의 도움을 요청한다. 그리고 겨우 메일을 보낸 뒤 가방에 넣어온 인형을 꺼내들지만, 다은은 이미 한매의 자장가 소리에 꿈나라로 떠난 뒤다.

엄마면서 ‘이실장’으로 불리는 워킹맘의 현실이 그렇다. 한매와 다은의 실종신고를 접수하는 경찰들은 어이없어 하지만, 아이와 보모가 목요일 아침에 사라진 걸 금요일 저녁이 지나서야 깨달을 만큼 가차 없이 고단한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실종은 지선을 극한의 위기로 몰아간다. 전 남편과의 양육권 분쟁에서 감치명령을 받고 시어머니의 매몰찬 재촉을 받던 지선은 경찰의 수배마저 받는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홀로 한매를 추적하며, 언제나 뒤처지는 남성 경찰들에 앞서 숨겨진 진실에 한발 한발 다가간다.

딸이나 아들의 실종 혹은 죽음을 다루는 모성 스릴러에서 자녀의 안전을 기원하거나 복수를 다짐하는 간절한 모성은 가해-피해관계에 대한 분노의 상승을 이끄는 동력으로 극적 긴장을 쌓아올린다. 하지만 한매가 한때 ‘목련’으로 불렸던 중국인 여성 ‘김연’으로, 가혹한 가부장적 억압 속에서 학대받으며 아픈 딸을 낳았으며, 그 딸의 치료를 위해 집에서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과정에서 지선의 적대와 분노는 고통을 함께 하는 이에 대한 깊은 연민과 동정으로 대체된다. 이는 짙은 안개 속 등 돌린 채 다은을 안고 서있던 여자가 바로 피 흘리는 지선 자신이었음에 놀라 깨는 꿈 장면으로 요약된다.

필사적인 추적극의 끝에서 지선은 한매의 진실이 곧 지선 자신의 것이기도 함을 깨닫는다. 한국말을 배우지 못한 한매가 죽어가는 딸의 구조를 요청하지 못했듯 지선의 구조 요청 또한 ‘정신이 불안한 여자’의 것으로 무시된다. 딸을 살리기 위해 누구에게라도 무릎 꿇고 애원했던 한매처럼 딸을 찾기 위해 지선의 무릎 또한 수시로 꺾인다. 딸의 실종에도 심드렁한 전 남편에게 구걸해야 하는 것처럼 한매 또한 무능하고 폭력적인 남편의 경제적, 성적 착취마저 견뎌야 했다. 유난히 손녀에게 집착하며 전 며느리를 냉대하는 지선의 시어머니 또한 씨받이로 들여온 중국인 여성을 가혹하게 학대했던 못 배우고 가난한 시어머니와 겹쳐진다.

결국 경제적 궁핍에 허덕이는 이주민 여성의 운명의 가혹함은, 그녀와 고용-피고용 관계를 맺었던 중산층 싱글맘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미쳤냐?”, “미친 거 아냐?”, “이상한 여자”라는 외면과 멸시의 언사와, “그러게 집안에 여자가 잘 들어와야 한다”는 억압적 말들에 포위된 가부장체제의 타자로서 지선과 한매는 정체성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선은 딸 재인을 잃은 한매의 슬픔에 용서를 구하고 한매를 뒤따라 바다로 뛰어내린다.

4년의 터울을 두고 만들어진 영화 <화차>와 <미씽 : 사라진 여자>는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옥죄고 억압하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적 착취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고발한다. 좀처럼 여성에 관한 이야기들이 만들어지지 않는 한국 영화현실에서 두 편의 영화가 갖는 남다른 존재감은 바로 이 점에서 비롯된다. 단지 ‘희귀종’인 여성감독이 연출했다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고단하고 강퍅한 현실을 생생하게 포착하는 예민함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력하게 맞물린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적 착취의 연쇄 고리 속에서 최약체 계층으로, 배척받는 소수가 되어 사라지는 수많은 여성들의 고통을 통찰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 것이다.

스릴러라는 외피를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멜로드라마적 정조를 과감히 기입하는 유사한 전략으로 동시대 여성들의 초상을 그리는 두 편의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이미지는 패닉 상태에 빠진 여성들의 얼굴이다. 인물에 가까이 다가간 카메라를 통해 만나게 되는 얼굴이란, 싸늘하게 식어가는 아이를 안은 채 오장육부를 다 끌어낼 만큼 깊은 오열을 뱉는 중국인 여성 한매의 것이며, 오로지 아이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거의 혼이 빠진 상태에서 길거리를 내달리는 워킹맘 지선의 그것이다. 그리고 오로지 살기 위해서 자신이 죽여야 했던 선영의 환영을 보고서야 비로소 짐승과도 같은 울음을 터뜨리며 달리는 경선의 얼굴이다.

그러니 여성적 연대의 상징적 이미지를 남긴 <미씽: 사라진 여자>의 감동적 엔딩조차 회의적인 것은, 그처럼 막다른 길로 몰리고 몰릴 뿐인 사회적 약자들이 전하는 강렬한 상실과 두려움의 감정 때문일 것이다. 책임져야 할 많은 이들을 지상에 둔 채 검고 푸른 바다 속에서 지선과 한매는 한 순간 손을 맞잡는다. 서로의 고통을 위로하고 언젠가는 함께 수면 위로 떠오를 미래를 기약한다는 점에서 이 장면의 감동은 결코 작지 않다. 하지만 다시 초기상태로 리셋된 프로그램처럼 일하는 싱글맘 지선은 “이래서 내가 애 엄마들하고 일하기 싫어요. 돈 주고 지 새끼들 사정까지 봐줘야 돼” 소리를 사방에서 듣는 고립된 처지로 다시 돌아갈 뿐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대체 어떻게 해야 ‘애만 불쌍하게 만드는 거지같은 엄마’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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