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은, 어디로 갔을까”

사랑해서 결혼하고 오랜 시간 함께 하며 늙어가는 부부. 각각 다른 뿌리에서 자라나 하나의 나무로 자라나는 연리지처럼, 어떤 이들은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해로한다. 프랑수아 오종의 프랑스 영화 <사랑의 추억>(2000)과 앤드류 헤이의 영국 영화 <45년 후>(2015)에서 오랜 세월 함께 한 두 쌍의 부부도 그럴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었다. 어느 새 주름 가득해진 배우자 얼굴에서 야속한 세월의 흔적을 확인할수록 더욱 신뢰와 연대가 깊어가는 삶을 살고 있다고, 오랜 시간을 함께 했기에 믿을 수 있었다. 바로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편이 사라졌다. 여름마다 찾았던 랑드의 별장에 짐을 풀고 바닷가로 나갔던 날, 자신의 등에 오일을 발라주고 수영하러 간 장(브루노 크레머)은 돌아오지 않았다. 실종이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죽음이라고도 했지만 마리(샬롯 램플링)는 여전히 찻잔을 두 개 준비하고 차를 마신다. 그리고 파리로 돌아와서 아름다운 옷차림으로 모임에 참여하고 강의를 다니고 쇼핑도 하고 운동도 빼먹지 않으며 지낸다. 여전히, 그녀의 곁에는 장이 있다. 함께 아침 식탁에 마주 앉고 잠자리에 들며, 자신을 위한 빨간 색 드레스를 고를 땐 그의 파란색 눈동자에 어울리는 넥타이도 잊지 않는다.

<사랑의 추억>에서 남편의 물리적 부재와, 이에 따른 결혼의 취소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마리의 대응은 필사적이다. 새로 만난 뱅상(자크 놀로)과 한 침대에 누워서도 그녀는 남편 장의 시선을 느낀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함께 한 25년의 힘은 그토록 강력하다는 것일까. 함께 밥을 먹고 체온을 나누었던 시간의 힘, 사랑의 기억으로 물리적 부재마저 무효화할 수 있을 만큼. 남들에게는 위험한 정신병적 증상이겠지만, 마리에게는 그날 이전과 다를 것 없는 현실이 계속된다. 그렇다면 프랑수아 오종이 서른셋의 나이에 만든 25년차 중년 부부의 이야기 <사랑의 추억>은 사랑으로 함께 써온 역사의 단단함과 영원함을 역설하는 작품으로 정리될 수 있을까.

그러기엔 걸리는 대목이 적잖다. 파리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별장으로 향하는 영화의 첫 장면, 선글라스를 끼고 운전하는 마리는 살짝 들뜬 듯 밝다. 하지만 남편인 장은 졸고 있다. 중년치고는 많이 날씬하고 날렵한 아내에 비해 유난히 커다란 덩치 때문에 느리게 움직이는 장의 태도는 더욱 귀찮은 듯 심드렁해 보인다. 파스타를 기다리는 식탁에서의 멍한 표정이나, 마리와 차를 마실 때 침묵 속에 시선이 흔들리거나, 아내의 등에 오일 마사지 할 때 쓸쓸하고 어둡던 표정까지, 분명 무언가 있다. 콧노래 흥얼거리며 경쾌하게 움직이는 마리는 모르는 무언가가.

장의 실종 혹은 죽음 이후 되돌아본 영화의 도입부는 별로 달갑잖은 휴가를 끌려온 남편의 피로감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분명히 가리킨다. 남편의 부재를 현존의 환상으로 대체하며 일상의 평온함을 억지로 가장하려던 마리의 필사적 노력을 무너뜨리며, 그것은 후반부 정체를 드러낸다. 장은 우울증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그는 자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랜만에 얼굴을 맞댄 그의 어머니는 더욱 ‘잔인한 진실’을 말한다. 아이 없이 단출한 부부만의 결혼생활에 만족했던 마리와 달리 그는 “가정을 선사할 능력이 없던 마리 때문에 지루해했으며 새로운 인생, 새로운 시작을 원했다”고. 그래서 '아주 단순하게' 사라진 거라고.

“실례합니다만, 제 남편 보셨나요?”, “제 남편이 사라졌어요. 찾을 수가 없네요.” <사랑의 추억>을 열었던 마리의 질문은 어부의 그물망에 걸린 사체가 발견된 종결부에서 다시 반복된다. 사체는 너무 오랫동안 물에 잠겨있어서 부패가 많이 진척된 데다 부분적으로 절단됐고 조직 식별도 불가능한 상태. 다만 마리에게 가혹했던 시어머니와의 유전자 검사 결과 90%의 정확도가 나왔으며 치과기록과 엑스레이가 일치했다고 한다. 하지만 장과 함께 한 25년의 세월만으로 무엇도 입증할 수 없는 마리는 단호하게 말한다. “난 그의 아내예요. 확언하건대 그가 아니에요.” 그리고는 다시 찾아간 겨울의 바닷가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길게 운다.

 

“나의 카티야!” 남편 제프(톰 코트니)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여느 날처럼 반려견 맥스와 산책을 하고 돌아온 케이트(샬롯 램플링) 앞에서, 결혼 45주년 파티를 일주일 앞둔 월요일 아침이었다. 어렴풋이 알고 있던 이름이기는 했다. 남편의 젊은 시절 한 페이지를 차지한 과거의 여성으로. 하지만 1962년 트래킹 도중 추락사한 카티야의 시신이 50년 만에 알프스 빙하에서 발견됐다는 편지 한 통은 몰랐던 많은 것을 알려준다. 스물일곱의 나이로 동사(凍死)한 카티야는 제프의 마음 한 구석에서 영생(永生)해 왔음을. 제프와 함께 했던 45년의 시간 동안 케이트와 제프 사이에는 카티야라는 여성이 내내 함께 하고 있었다는 것을.

마흔 두 살의 앤드류 헤이 감독이 만든 <45년 후>는 가혹하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삶의 마무리만 남은 45년차 부부의 일거수일투족은 잘 맞는 요철처럼,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서로에게 익숙하다. 하지만 아이가 없으니 ‘사진 찍을 이유가 없는’ 삶이어도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남편은 카티야의 사진을 다락방 깊숙한 곳에 숨겨놓고 있었다. 존경받는 교사로 퇴직한 뒤 마음의 평화와 일상의 행복을 영위하던 케이트의 지난 45년은 한 순간에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다. “만일 그녀가 죽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녀와 결혼했을까?” 물었을 때 거침없이, 단호하게 “그렇다”고 대답하는 남자와 함께 했던 45년은 그러면 무엇이었을까.

‘하루하루가 의미 있던, 목적의식 충만했던’ 과거로 혼자 퇴행해버린 남편의 빈자리는, 50년 전 카티야를 삼켰던 거대한 크레바스처럼 철석같은 신뢰와 단단한 사랑의 연대가 은폐했던 거대한 공허를 드러낸다. 물론 입만 열면 카티야와 알프스를 찾고, 곧 스물다섯 살 청년의 열정으로 돌아갈 것처럼 들떴던 제프도 결국 인정하기에 이른다. 80 넘은 노구를 끌고 찾기에 알프스는 너무 멀고 험준하며, 자신의 곁에 있는 건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던 젊고 아름다운 카티야가 아니라, 그 모든 시간을 함께 하며 주름 가득해진 늙고 성실한 아내 케이트라는 사실을.

케이트와 제프는 토요일의 결혼 45주년 기념 파티를 성실하게 준비한다. 그건 그들이 지난 시간 동안 늘 함께 해왔던 일이었다. 평생 그랬던 것처럼, 제프의 약을 챙기고 함께 저녁을 먹고 잠을 청하고 새로 일어나면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을 거라고 케이트는 말한다. “그건 할 수 있다”고 제프도 약속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가장 아름다웠던 날을 생생히 기억하는 결혼식 하객들과 동료, 지인들 앞에서 제프는 눈물과 함께 고백하고 청한다. “지금껏 내 곁에서 내 말도 안 되는 짓을 참아서 고맙고, 앞으로도 쭉 그래줘.”

하지만 돌아온 유령 카티야와의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으로 이미 마음이 사막이 돼버린 케이트는 답변할 말을 찾지 못한다. 결혼식 때 흘렀던 ‘Smoke gets in your eyes’에 맞춰 춤을 춘 뒤 감흥에 젖은 제프는 케이트의 손을 높이 쳐들지만 그녀는 화들짝 놀란 사람처럼 황급히 손을 빼낸다. 아내의 손이 빠져나간 빈손의 공허를 눈치 채지 못한 제프가 파티장의 박수와 환호에 파묻힐 때, 홀로 남은 케이트의 두 눈이 급격히 흔들린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왈칵 터져 버릴 것만 같다.

코 짧지 않은 25년, 그 두 배 가까운 45년의 길고 긴 시간도 결국은 무력하기만 했다. <사랑의 추억>에서 “남편이 우울해하거나 싫증내거나 죽고 싶다는 욕망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냐”며 자살 여부를 경찰이 물어올 때 마리는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알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작 알아야 할 것들을 모르는 채로도 잘만 흘렀던 게 시간이었다. 마치 엊그제 일처럼 생생한 그리움을 감쪽같이 품은 채로도 45년의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세상에서는 그걸 ‘해로한다’고 말하던가.

원제가 각각 <Under the Sand>와 <45 Years>인 <사랑의 추억>과 <45년 후>는 남녀 간의 성애적 사랑을 바탕으로 유지되는 결혼제도를 신랄하게, 저 바닥 깊은 곳으로부터 회의한다. 오랜 시간이 선물해준 안정적인 삶의 관성에도 불구하고 부부라는 이름의 결속이 갖는 본래의 취약성은 언젠가 드러나고 만다. 행복의 이상을 함께 추구하고 있다고 확신했던 그 시간들은 어디로 갔을까, 행복을 연기하며 고통을 곱씹거나 그리움을 되새김질한 그는 대체 누구였을까, 그는 나를 사랑했을까, 그와 사랑하는 시간을 통해 존재한다고 확신했던 나는 그럼 누구인가. 폐허가 되어가는 일상 속에서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만 이어진다.

영국에서 태어나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샬롯 램플링(1946년생)은 그 존재 자체로 <사랑의 추억>, <45년 후>가 전하는 서늘한 진실을 체화한다. 결혼생활 25년에도, 45년 후에도 날렵한 몸가짐과 경쾌한 몸놀림을 선보이는 그녀의 깊고 아름다운 두 눈은 멜로드라마적 평온을 고요히 설득하는 힘을 과시한다. 하지만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삶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스릴러적 공포를 전할 때 더욱 압도적이다. 두 영화는 해변가 남자를 향해 혹은 그 남자를 비껴 달려가는 마리의 뒷모습과, 형언하지 못할 슬픔과 고통을 전하는 케이트의 앞모습으로 끝난다. 이토록 미스테리하고도 모호한 엔딩에서, 그 깊은 불안과 위태로움에서 만나게 되는 건 바로 우리 자신의 낯익은 얼굴이다.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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