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남없이 팍팍하고 살기 힘들다는 세상. ‘냉대’나 ‘박대’ 또는 ‘적대’라는 말이 차라리 가깝고 친근해질수록 ‘환대’는 점점 버겁고 부담스러워진다. 힘들거나 어려움에 처한 누군가를 내 집 내 삶의 반경에 들여놓고 무심한 듯, 생색내지 않고 따뜻한 차 한 잔, 부드러운 손길을 건네는 건 정말 어렵다. 그렇게 누군가에 대한 환대의 기억은 점차 흐려지고, 세상은 딱딱해져 간다. 벨기에의 형제 감독 다르덴의 <자전거 탄 소년>(2011)과 영국 리얼리즘 영화의 최전선,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를 다시, 함께 봐야하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타당하고 합리적인 이유 등등 까다롭고 장황한 사유들이 없는 채로, ‘그저/그냥’ 이루어지는 따스한 환대가 거기 있다.

은 동네 치과 대기실에서 시작됐다. 숨을 헉헉대며 들어온 어떤 소년과, 뒤이어 들어온 경비원과 또 한 사람이 좁은 대기실에서 쫓고 쫓기는 실랑이를 벌이는가 싶더니 소년의 몸이 의자에 앉아있던 사만다(세실 드 프랑스)를 덮쳐 바닥에 쓰러뜨렸다. “소란 피우지 말고 같이 가자”, 달래는 어른들에게 끌려 나가지 않으려는 소년의 안간힘으로 그에게 붙들린 사만다의 왼팔이 아파왔다. “아파, 이것 좀 놔줘”, “조금만 살살 잡아줄래?…” 곧 사만다의 왼팔은 자유로워졌고, 소년은 어른들을 따라 밖으로 나간다. 하지만 말도 없이 사라져버린 아빠를 필사적으로 찾는 보육원 소년 시릴(토마 도레)에게 사만다의 영혼은 그대로 붙들린 채였다. 강렬한 통증과 함께.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형제의 <자전거 탄 소년>에서 동네 미용실을 운영하는 사만다는 아들을 자신의 삶 바깥으로 내친 시릴의 아버지가 남긴 빈자리에 들어선다. 크롬 포크가 달린 검정 자전거를 돈을 주고 되사서 찾아갔을 때, 아버지가 돈 받고 팔아버린 자전거를 본 시릴은 비로소 열한 살 남자아이의 얼굴로 돌아갔었다. 그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아 자신의 차를 따라왔던 시릴과의 약속을 지켜 사만다는 주말 위탁모가 된다. 그리고 시릴의 모든 삶에 관여된다. “아빠 만날 생각 마, 거기서 아줌마랑 잘 살아. 전화 안할 거야”라는 아버지 가이(제레미 레니에)의 최후통고를 시릴과 함께 듣고, 자신의 얼굴을 자해하던 소년의 조용한 통곡을 다독인다.

 마치 한가한 어느 주말의 교통사고처럼, 느닷없이 왼팔을 붙들렸던 그날 이후 사만다의 삶 또한 시릴의 불운한 삶이 만들어내는 서스펜스의 가파르고 서늘한 파장에 포획된다. 심부름을 마친 아이에게 거스름돈을 확인하거나 어둠 속에 2시간 동안 아이를 찾아 헤매는 건 그저 일상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어린 먹잇감을 노리는 웨스(에곤 디 마테오)로부터 보호하려다 그녀의 왼팔이 다시 시릴의 가위에 상처 입던 날, 불행의 예감처럼 경찰이 미용실을 찾아온다. 그리고 시릴의 몽둥이질로 청구된 총 1750유로를 20개월 상환하기로 하고 시릴을 집으로 데려온다.

 <자전거 탄 소년>에서 시릴에 대한 사만다의 이러한 헌신은 지속적으로 의문시된다. 성질을 잔뜩 부리고 어둠 속에 찾아다니게 만드는데다 욕까지 하는 그깟 보육원 남자 아이를 감싸는 사만다를 이해할 수 없던 남자친구 리(파브리지오 롱기온)는 그들의 세계로부터 일찌감치 발을 뺀다. 시릴과 사만다가 처음으로 함께 한 식사장면에서의 대화도 명쾌하지 못하긴 마찬가지. “왜 저를 맡았어요?”에 대한 사만다의 답, “네가 원했잖아”는 “그러니까 왜 허락했어요?”라는 질문을 덧붙이게 하고, 그 질문에 사만다는 대답하지 못한다. “글쎄”라고 얼버무리며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릴 뿐.

 다르덴 영화에서 인물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기대하는 건 우물에서 콜라 찾는 격이겠지만, <자전거 탄 소년>은 특히 사만다에 대한 설명에 인색하다. 가령 그녀에게도 시릴과 같은 아이가 있었다거나, 아님 시릴처럼 고단한 어린 시절을 지나왔다는 등의 트라우마를 행동의 배경으로 깔지 않는다. 인물의 욕망과 동기를 되도록 설득력 있게 제시함으로써 관객의 동의를 구하곤 하는 영화적 화법을 감안한다면 시릴의 구원자로 그려지는 사만다의 캐릭터는 입체적 형상화라는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 그저 호랑이에 쫓기는 남매를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튼튼한 동아줄처럼 그렇게 시릴 앞에 놓일 뿐이다. 그만큼 절박한 소년의 구원의 요청만이 사만다라는 극적 존재의 당위성을 제공한다.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다니엘 블레이크(데이브 존스)도 비슷하다. 오랫동안 병간호에 매달렸던 아내 몰리가 세상을 떠나자 슬픔 속에서도 그는 한시름 덜겠구나 생각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고 그는 가파른 외길로 내몰린다. 심장병으로 일을 못하게 됐는데도 질병구호수당 신청에서 탈락하자, 실업수당이라도 타려고 나서지만 디지털 세상의 경직된 관료주의와 신자유주의는 평생 나무만 만져온 목수에게 인간적 수모만 잔뜩 안겨준다. 결국 오래된 가구마저 다 처분한 텅 빈 집에서 그는 삶의 마지막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불운과 자신에게 닥친 불행에 절망하는 대신 아버지가 다른 어린 남매를 끌고 런던에서 뉴캐슬로 이주한 젊은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를 위해 기꺼이 바람막이가 된다. 지리에 서툴러 고작 몇 분 늦은 걸 ‘정시출석 의무사항 위반’으로, 제재 대상으로 판정하겠다는 ‘원칙’의 비인간성에 떨쳐 일어서 항변한 그날, 이것저것 담긴 비닐봉지를 함께 나눠든 다니엘은 케이티의 집으로 향한다. 고장 난 변기와 부실한 문짝을 고치고, 작은 초 네 개로 추운 집에 온기를 불어넣은 다니엘은 자신의 전화번호를 남긴 메모와 함께 20파운드를 전기요금으로 쓰라며 남겨놓는다.

 영리하고 착한 딸 데이지, 런던에서 2년간 계속됐던 쉼터 생활로 정서 및 행동 장애를 보이는 아들 딜런과 외롭게 분투하던 케이티는 그렇게 몰리를 떠나보낸 다니엘의 새로운 가족이 된다. 그는 뽁뽁이 비닐 붙인 유리창에 근사한 나무 모빌을 달아 ‘볕이 잘 드는 바다’를 데이지에게 선물한다. 그러나 내 코도 석자인 그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며칠째 저녁을 먹고 왔다며 과일만 집어드는 케이티가 내민 저녁 한 그릇을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고맙게 먹고, 식료품 지원소에서 허겁지겁 통조림을 들이켜던 케이티의 수모를 “자네 잘못이 아니야…괜찮아질 거야”라며 다독일 뿐.

 당장 자신의 앞가림조차 막막한 다니엘이 선뜻 케이티 가족에게 내미는 손은 그 자체로 온갖 ‘안 되는 이유’만을 준비하고 있는 세상에 보내는 강력한 저항의 메시지가 된다. 질병수당신청 심사에서 12점을 받은 그는 15점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 항고를 하려면 의료전문가의 재심사가 기각돼야만 가능하도록 ‘되어있다’는데, 이 모든 결정통고는 전화를 통해 받도록 ‘되어 있’단다. 이미 우편으로 도착한 신청기각 서류를 멀쩡히 두고도 하염없이 전화를 기다리던 그는 직접 일자리센터를 찾아가지만 구직수당 신청이건 항고 신청 양식이건 인터넷에서 받게 ‘되어 있’으며, 컴퓨터 근처도 안 가본 사람을 위해서는 난독증 대상의 특별 상담번호가 준비 ‘되어 있’지만, 예약 없이 왔다면 일단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다니엘이 접하는 이 신세계는 그가 살고 있는 세상과 같지 않은 곳이다. 전 일터에서 함께 일하던 젊은 동료는 “장보기 정도는 도울 수 있으니 짐꾼으로 부리라”며 “언제든 말씀만 하시면 뭐든 돕겠다”고 말한다. 다니엘의 잔소리에 질색하던 옆 집 차이나도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만 하세요. 진심이에요” 당부했었다. 도서관에서 도움을 청하는 컴맹 어른에게 옆자리 젊은이들이 귀찮은 내색 없이 시간을 내주는 곳, 할머니에게 길을 안내하는 이들을 거리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게 다니엘이 살아온 세상이었다. 하지만 다니엘을 진심으로 걱정하던 일자리센터의 직원 앤은 “잘못된 선례를 만들 수 있다”는 상사의 경고성 질책을 들어야 한다.   

 그러니 생전 처음 보는 컴퓨터 마우스를 실제 모니터 위로 올려드는 시대착오적 ‘연필시대 사람’에게는 쉴 틈조차 없이 ‘되어 있는’ 온갖 매뉴얼과 규정, 관행과 원칙들이 그저 어이없고 환장할 노릇이다. 애도 둘이나 데리고 왔는데 원칙 운운하며 인정머리 없이 내치는 직원들, 문제 제기하는 이들에게 경찰을 부르겠다며 협박하는 경비원들이야말로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보험번호 숫자’도 ‘화면 속의 점’도 아닌 인간으로 그는 자신이 살아온 ‘연필 시대’의 도리를 실천한다. 게다가 런던의 쉼터에서  접었던 꿈을 위해 일과 공부를 병행하겠다는 케이티를 응원하겠다고 다니엘은 말했었다. 그러니 위탁모가 되겠다는 급작스런 약속을 끝내 지켰던 사만다처럼 다니엘 또한 할 수 있는 한, 성실하게 자신의 약속을 지킨다.

<자전거 탄 소년>에서 시릴은 아버지의 빈자리를 노리고 접근한 웨스의 꼬드김에 넘어가 두 번이나 사만다의 전화를 외면했었다. 하지만 강도질한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던 피해자 소년의 돌에 맞아 나무에서 떨어져 시체처럼 누워있던 마지막 장면에서 사만다의 전화벨 소리에 깨어난다. 오지 않는 아버지의 전화를 기다리던 소년은 이제 자신을 찾는 사만다의 전화벨 소리에 몸을 일으켜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간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제발 날 좀 내버려달라”면서 다니엘을 외면하던 케이티도 끝내 다니엘이 외치지 못했던 마지막 한 마디를 대신 전함으로써 그와 자신이 서로에게 ‘잠시 기대어 쉴 바람’이 되었음을 이야기한다.

물론 영화가 더 이상 보여주지 않는 미래마저 낙관하기는 조심스럽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선율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화면 왼쪽으로 사라져버린 시릴이 무사히 사만다의 집까지 갔을지, 그러다가 길바닥에 맥없이 고꾸라지고 말았을지는 모를 일이다. 마땅한 일자리 없이 도둑질에 몸까지 팔아야했던 케이티가 과연 다니엘의 마지막 선물이었던 책장에 빼곡하게 책을 꽂아두고 학업에 집중할 수 있을지도 역시 불확실하다. 하지만 절박한 구원의 신호와, 그것에 대한 즉각적인 화답으로 이루어진 사만다와 다니엘의 환대가 있어 시릴과 케이티가 삶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음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할 것이다. 도움을 청하는 손, 그에 화답하는 손 모두 ‘인간적 존중을 요구할 권리’를 갖는 인간의 것이므로.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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