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생각하며>

가는 이의 뒷모습

 

-떠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아름답습니다.
 
(老) 대통령의 금도에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그것이 대인의 도리입니다
-

 

 

“국민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습니다.” 온 국민의 시선이 서울중앙지검으로 쏠린 가운데 대통령이 아니라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된 박근혜씨의 국민에 대한 메시지는 단 29자였습니다.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하고 탄식하던 그 치욕의 연장이었습니다.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노태우, 전두환, 노무현씨에 이어 네 번째 전직대통령의 검찰 소환. 대한민국 헌정사의 숨길수 없는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1960년 봄에 일어 난 ‘4월혁명’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 권력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최초의 위대한 ‘국민혁명’이었습니다.

‘4월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은 3·15부정선거였습니다. 12년 장기집권에도 모자라 종신집권을 꿈꾸며 4대 대통령에 출마한 이승만은 후계자로 이기붕을 내세워 관권(官權)을 총동원해 투·개표 부정선거를 저질렀고 그것이 대학생들을 비롯한 전 국민적 저항을 불러와 끝내 집권당인 자유당의 붕괴와 함께 권력을 내려놓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역사적 사건입니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점차로 격화되는 가운데 불에 기름을 부운 것은 마산에서 시위 중 행방불명된 고교생 김주열군이 눈에 팔뚝만한 최루탄이 박힌 채 부둣가에서 변사체로 떠 오른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너무나 처참한 소식이 전해지자 시위는 이내 들불처럼 사방으로 번져 나갔고 특히 서울에서는 지금의 청와대인 경무대(景武臺)로 몰려가던 대학생들에게 경찰이 무차별 총격을 가함으로써 무려 180여명이 목숨을 잃는 일대 참극이 일어났습니다.

전국이 온통 극도의 혼란에 휩싸이자 계엄령이 선포됐고 중무장한 군부대가 전방에서 서울시내로 진입했습니다. 그러나 사태는 이미 기울어져 병사들이 탱크 위에 올라온 시민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급기야 이승만은 4월 26일 하야(下野)성명을 발표하고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옵니다. 

이승만은 그로부터 한 달 뒤인 5월 29일 안개 자욱한 새벽,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김포공항을 떠나 비밀리에 하와이로 망명길에 오릅니다. 이승만은 그곳에서 5년여 동안 교포들의 도움으로 쓸쓸한 요양원 생활을 하다가 1965년 7월19일 숨을 거두고 고국에 돌아와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힙니다.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는 73세의 늦은 나이였습니다. 그로부터 6·25전쟁을 겪으며 12년 대통령직에 재임하는 동안 ‘인(人)의장막’에 둘러싸여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네 번째 대통령에 출마한 1960년은 이미 85세의 노쇠한 몸으로 판단력조차 희미해져 측근참모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한 실정이었습니다. 1934년 미국에서 결혼한 오스트리아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25세 연하로 한국 실정을 잘 몰랐고 경무대 생활 중에도 부부간의 대화조차 영어로 소통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뒷날 역사는 이승만을 ‘독재의 화신’으로 나쁘게 평가하고 있기는 하지만 마지막에는 잊혀지지 않는 또 다른 일화도 남겨 놓았습니다.    

시위가 격화 돼 사회가 큰 혼란에 빠지고 참모들이 전전긍긍하자 이승만은 “불의를 보고 일어나지 못하는 민족은 죽은 민족이다. 국민이 그만둘 것을 원하면 내가 물러나면 된다”고 소신을 밝히고 시위 중 부상당한 학생들을 병원으로 찾아가 “부정선거와 부정부패에 대항해 일어나다니, 장하다”라며 용기를 치하하고 대통령 자리를 내려왔습니다.

또 하야소식을 들은 자유중국의 장제스(蔣介石)총통이 위로 전문을 보내왔습니다. 장제스는 모택동에게 본토를 빼앗기고 대만으로 피신해와 명맥만 유지하고 있어 같은 분단국이라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남다른 우정을 갖고 있던 터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정의를 사랑하는 청년학도들이 있는 한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을 것입니다”라고 답신을 보냈습니다. 자신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국민들에게 서운한 감정을 표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용기를 칭찬한 이승만의 도량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화제가 됐었습니다. 

그랬기에 이승만이 경무대를 떠나 사저(私邸)인 이화장(梨花莊)으로 옮겨 갈 때 일부 시민들이 연도(沿道)에 나와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치기도 했습니다. 비록 국민을 도탄에 빠뜨리고 독재로 나라는 잘 못 다스렸을 지언 정 깨끗한 마지막을 보인 그 의연한 태도는 박수를 받았던 것입니다. 

결국 피의자로 검찰에 소환된 박근혜 전 대통령. 오만한 권력의 종말이 어떻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다. 21일 오전 서울중앙지검. /Newsis

1960~2017년. 그로부터 57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 우리국민들은 또 한 사람의 대통령을 자리에서 끌어내렸습니다. ‘박근혜 아웃(PARK OUT).’전 세계의 언론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촛불로 권력자를 퇴출시킨 ‘명예혁명’이라고 한국인들을 칭찬합니다. 하지만 이번 탄핵사건은 국가적으로나, 국민적으로나 매우 불행한 비극이지, 자랑거리는 아닙니다. 온갖 추악한 사건들이 뒤엉켜 국정은 혼란에 빠지고 촛불이니, 태극기니하고 국민은 둘로 갈라졌습니다. 개인적으로 당사자인 박근혜씨의 참담함 또한 웃고 즐길 일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2012년 선거 때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고 당찬 모습을 보이던 후보시절 모습은 간곳없고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탄핵판결을 받고 검찰청 포토라인에 피의자로 선 치욕의 모습을 봐야하는 국민들의 심정 또한 고통스럽습니다.

박근혜씨는 탄핵이 결정됐을 때 바로 과오를 인정하고 헌재판결에 승복하는 태도를 보였어야 합니다. 그것이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의 도리요, 의무입니다. “국민 여러분, 모든 것은 제 부덕의 소치입니다. 저로 하여 국가에 누를 끼치고 국민여러분에게 걱정을 끼쳐드려 송구합니다”하고 머리를 숙였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그렇게 어렵습니까. 미적미적 뜸을 들이며 누구를 원망하는 태도로 “엮은 것”이라느니 “진실은 밝혀질 것”이라니 이해하기 어려운 군색한 모습으로 오히려 자신이 피해자인양 코스프레를 보여 국민들을 더욱 화나게 하고 있습니다. 승복을 하네, 하지 않네, 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입니다. 

지금 박근혜씨는 온갖 설(說)과 설로 심신이 갈기갈기 찢겨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태극기를 든 열혈지지자가 집 앞 아스팔트에 엎드려 “아이고, 마마! 마마!”하고 울부짖고 “계엄령을 선포하라”는 황당한 이들도 있긴 하지만 현실은 이미 공적이든, 사적이든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땅을 치고 싶겠지만 지금 현실은 만사(萬事)가 허사(虛事)가 되었습니다. 그 어느 초능력자가 있다한들 결코 과거로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박근혜 시대’는 끝났습니다.

“국민이 내려오라면 내려가야지…”하고 미련 없이 자리를 내려왔던 그 옛날 노(老) 대통령의 금도(襟度)에서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무릇 대인(大人)의 도리입니다.

이형기시인은 ‘낙화(落花)’ 첫 머리에 이렇게 썼습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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