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생각하며>

허유와 소부

 

-그 옛날의 어진 이들은
 
천자의 자리도 사양했다는데
 오늘 이 나라에서는
달팽이 뿔 위에서 싸우듯

 대통령 후보들이 넘쳐나네-

 

헌법재판소의 ‘탄핵시계’가 예상외로 빨리 돌아가는 가운데 12월19일로 예정된 19대 대통령 선거가 훨씬 앞당겨질 가능성이 높아지자 목하(目下) 정국은 급속히 선거분위기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기름에 불을 당긴 것은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입니다. 반 전총장은 두 차례에 걸친 임기 10년을 무사히 마치고 며칠 전 귀국 제일성(第一聲)으로 ‘정치교체’라는 화두를 출사표로 던짐으로써 그동안 모호하게 감춰 온 자신의 대권의지를 분명히 한 것입니다.

반 전총장은 몸소 자동판매기에서 표를 끊는다, 시민들과 함께 전철을 탄다, 생수를 사 마시는 등의 서민제스처를 보이면서 미처 여독(旅毒)을 풀 겨를도 없이 국립묘지로, 꽃동네로, 조선소로, 봉하마을로, 진도팽목항으로, 광주 5·18민주묘지로 발 빠른 광역행보를 보이며 전국을 누비고  있습니다. 사실 그동안 반 전총장은 기회 있을 때 마다 대권 출마여부를 묻는 기자들에게 명확한 답변을 피한 채 속내를 숨겨 와 ‘기름장어’라는 소리를 들어왔습니다. 그러던 그가 귀국하자마자 진보, 보수를 가리지 않고 영호남을 넘나들며 강행군에 나서자 정국은 이내 선거판으로 돌변했습니다.

지금 전선은 여론조사 1위를 달리고 있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대표를 필두로 반기문, 안철수, 이재명, 박원순, 황교안, 손학규, 안희정, 남경필, 유승민, 정운찬, 이인제, 심상정 등 10여명의 ‘잠룡(潛龍)’들이 출진을 서두르며 각축을 벌이고 있습니다.

가위(可謂) 와우각상지쟁(蝸牛角上之爭)의 형국이라고나 할까, 달팽이 뿔 위에서 싸우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나라에 큰 꿈을 가진 사람이 많아서 나쁠 거야 없겠지만 대한민국은 그리 큰 나라도 아닌데 대통령이 되겠다는 인물들은 포화상태로 마치 군웅이 할거(群雄割據)하는 복잡한 형세입니다.

중국 역사에서 성천자(聖天子)라 추앙받는 요(堯)임금(BC2356~2255)이 나이가 들어 기력이 약해지자 천자의 자리에서 물러나려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뒤를 이을 아들이 있었지만 나라를 다스리기에는 능력이 모자랐습니다.

요임금은 허유(許由)라는 어진 은자(隱者)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허유는 바른 자리가 아니면 앉지 않고 분에 넘치는 음식은 입에 대지 않았고 오직 의(義)를 따르는 곧고 깨끗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요임금이 그를 찾아갔습니다. “해가 떠올랐는데도 아직 횃불을 끄지 않는 것은 헛된 일이오. 청컨대 천자의 자리를 받아주시오.” 허유는 말했습니다. “뱁새는 넓은 숲에 집을 짓고 살지만 나뭇가지 하나면 충분히 앉을 수 있고 두더지는 목이 마르면 황하의 물을 마시되 배만 차면 그것으로 족하답니다”하고 사양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허유는 깊은 산속으로 거처를 옮겨갑니다.

권세와 명예에 욕심이 없었던 허유는 그런 말을 들은 자신의 귀가 더러워 졌다고 생각해 강으로 나가 흐르는 물에 귀를 씻었습니다.

그때 마침 소를 끌고 물을 먹이려고 온 소부(巢夫)가 허유에게 묻습니다. “아니, 왜 귀를 씻으시는가?” “아, 글쎄 요임금이 찾아와 나에게 천하를 맡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소. 그래, 내 귀가 더러워져 이렇게 씻는 중이라오.” 사연을 들은 소부는 큰 소리로  껄껄 웃었습니다.

허유가 “왜 웃으시오?”하고 물었습니다. “그야, 그대가 숨어 산다는 소문을 퍼뜨렸기에 그런 더러운 말을 듣는 게 아니겠소. 모름지기 은자란 애당초 이름조차 세상에 알려서는 안 되는 법이란 걸 몰랐소? 그런데 그대는 자신이 현자(賢者)라는 소문을 은근히 퍼뜨려 명성을 얻은 게 아니오.” 소부는 혀를 차며 소를 끌고 강 위 쪽으로 올라갑니다.

허유가 의아해 물었습니다. “소 물은 안 먹이고 어디로 가시오?” 소부는 “그대가 귀를 씻은 더러운 물을 내 소에게 먹일 수가 없어 물이 깨끗한 저 위로 올라가는 것이라오”하고 퉁명스레 대답합니다.

중국의 역사서에는 부귀공명을 멀리하고 권세를 하찮게 여긴 어진사람을 비유적으로 말할 때 4000여 년 전 허유와 소부의 이 고사를 교훈으로 인용해 후세에 전합니다.

‘정치 교체’를 선언하고 대권 도전에 나선 반기문 전유엔사무총장. 출발과 함께 혹독한 검증에 시달리고 있다. /Newsis

사실 반기문 전총장이야말로 대한민국이 배출한 큰 인물입니다. 유엔이라면 2차 세계대전 뒤 강대국들이 주도해 탄생시킨 세계최고의 국제기구입니다. 전 세계 193개국이 회원국으로 가입해 국제분쟁 등을 조정하는 그 막강한 위상은 긴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런 유엔의 사무총장이라면 국가원수 급의 예우를 받는 명예로운 자리입니다. 당연히 대통령후보로서 손색이 없는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때마다 차기 대선후보로 거론이 돼 왔고 박근혜정권의 뒤를 이을 유력한 후보로 공인이 되다 시피 해 온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비선실세 국정농단으로 박대통령이 실각위기에 놓임으로써 반 전총장의 대선가도에도 비상등이 켜진 것입니다. 반 전총장의 발걸음이 빨라질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국민들 가운데는 반 전총장을 걱정하는 이들도 적잖이 있는듯합니다. 모두 알다시피 반 전총장은 외교관으로 평생 ‘꽃 길’을 걸어 온 사람입니다. 인품 또한 훌륭해 주위의 존경도 받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진흙탕이나 다름없는 선거판에 나선다는 것은 사지(死地)에 뛰어 드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국회의원에 출마를 해도 고조할아버지 생전 술버릇까지 들먹이는 선거풍토에서 외교관 체질의 반 전총장이 과연 혹독한 검증을 견뎌낼 수 있겠느냐, 또 당선이 된다 해도 정쟁으로 날이 새고 지는 험한 정치판을 원만히 조정해 국정을 이끌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신문 방송들은 때를 만난 듯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조카가 어떠니, 23만불을 받았느니, 위안부합의가 어떠니 공격을 시작했고 인터넷에도 ‘턱받이’니, ‘퇴주잔 음복’이니 별것 아닌 해프닝성 실수들을 마구 퍼 나르며 떠들고 있는 실정입니다.

때문에 반 전총장에 호감을 갖고 있는 이들 중에는 “유엔사무총장이면 세계대통령인데, 명예롭게 그것으로 끝냈으면 좋았을 걸…”하고 아쉬워하는 소리도 들립니다.

아닌 게 아니라 전직 대통령들의 말로(末路)를 보면 거의 불행하게 끝을 맺은 것이 우리 현대사입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임기 중에는 국부(國父)로 떠받들어 지기도 했으나 종신집권을 꿈꾸다 4·19혁명을 자초해 권좌에서 밀려 나 망명지 하와이에서 객사했고 남산에 있던 그의 동상은 젊은이들에 의해 밧줄로 끌어 내려져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부인마저 비명횡사하는 불행을 당하고 18년 장기집권 끝에 측근에게 피살되는 참혹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1980년 광주민주항쟁을 통해 수많은 시민을 희생시키고  대통령이 된 전두환은 옥고(獄苦)를 치르고도 모자라 국민의 따가운 눈총 속에 가시방석에 앉아있고 노태우 또한 부정축재로 수감생활을 겪고 지금 병상에 누워있습니다. 그뿐인가.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지만 노무현 역시 후임 정권의 보복을 피하지 못한 채 바위에서 투신해 비참한 최후를 맞은 충격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합니다.

또 현직인 박근혜대통령 역시 수렁에 빠져 허덕이는 것을 보면서 이 땅에서 권력의 종말이 어떠하다는 것을 아는 뜻있는 이들이 반 전총장의 정치입문을 염려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옛날 허유와 소부의 지혜를 다시 생각하는 것 역시 바로 그 때문입니다.

결과가 어떠하든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습니다. 남은 것은 한판 승부요, 국민의 선택입니다. 누가 됐든 이번만은 제발 법을 어기지않는 ‘좋은 인물’이 당선되어 나라를 잘 이끌고 국민을 평안하게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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