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관정리 303-21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고령 신문(高靈申門) 효열각(孝烈閣)은 누구나 찾기 쉬운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다.지난 2015년 4월 17일 청주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된 이후로 수많은 행인들의 바쁜 발걸음들을 지켜보면서 말없이 그 자리에 있었으리라.이 효열각은 1807년(순조7)에 효행(孝行)으로 참판(參判)의 벼슬이 내려진 종산(鐘山) 신집(申潗, 1623~1689)과 신우권(申佑權)의 처 열녀(烈女) 파평 윤씨(坡平尹氏)의 효열을 기리어 세운 정려이다.1985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긴 건물로서 정려 앞에는 커다란 은행나무와 함께 그들의 사연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정려의 울타리는 사면을 철제로 둘렀고 안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 겹
김태희(金泰熙, 1877. 10. 18.∼1936. 6. 29.)는 청주시 상당구 탑동 출신으로 청주 지역의 항일 투쟁을 주도한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이다. 호는 일석(一石), 김세기(李世基)라는 다른 이름을 사용하였다.어려서는 한학(漢學)을 배웠으나, 신학문에도 일찍이 눈을 떠 예수교 장로회 장로로써 활동하였다.한말 일제에 의해 나라가 기울어가자 1904년 11월 1일에 충청북도 청주군 남주내면 옹성리(현 상당구 남문로 2가) 방흥근(方興根)의 집에서 김원배(金元培)와 함께 광남학교(廣南學校)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역임하면서 교육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그러나 학교 경영이 어렵게 되자, 청주 남석교 인근 청주읍교회로 이전하여 미국인 선교사 민노아(閔老雅)와 함께 운영하며 종교 계통의
김진환(金振煥, 1879. 2. 14.∼1934. 3. 2.)은 충청북도 청주군(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미원리 출신으로 미원 만세 운동에 참여한 인물로 다른 이름은 김진환(金進煥)이다.1919년 3월 30일에 충북 청주군(淸州郡) 미원면(米院面) 미원리(米院里) 시장에서 신경구(申敬求), 이용실(李容實)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그날 오후 2시경 신경구는 시장 네거리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 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쳤다.이에 호응하여 시장 부근에 있던 군중들도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 행진에 들어갔다.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은 군중의 해산을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시위 군중의 수는 1,000여 명으로 늘어났다.점점 형세가 불리해지자 일본 헌병은 신경구를 체포하여 주
김종옥(金鍾玉, 미상∼1907. 8.)은 충청북도 청주 출신으로 한말 의병활동을 한 인물이다. 그는 이강년(李康年) 의진에 가담하여 충북 일대에서 활약하였다.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일제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되고, 이듬해 1월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자 본격적인 반일 국권회복(國權回復) 운동(運動)을 전개하게 된다. 국권회복 운동의 방향은 장기적 국권회복 운동으로는 언론·종교·교육 및 학술활동 등 각 방면의 국민 계몽 운동을 전개하여 실력 양성 운동을, 즉각적인 방법으로는 의병 활동으로 크게 두 방향에서 전개되었다.김종옥은 언제부터 의병 활동을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구한말 의병장으로 활동한 이강년(李康年, 1858. 12. 30.~1908.
김제환(金濟煥, 1867. 10. 20.∼1916. 10. 5.)은 충청북도 청주군 산내이상면(山內二上面) 이목정리(梨木亭里) 출신으로 일제 침략에 항거하고 단식 순절한 인물이다.자는 문도(文道), 호는 소당(素堂)이며, 본관은 김해(金海)로 일제강점기 청주의 ‘백이숙제(伯夷叔齊)’로 칭송받았다.김제환과 동생 성환(成煥)은 청주 지역의 유생으로써 당시 청주군 산외일면 비상리와 산내이상면 문박리에서 각각 서당을 설치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한일합방의 부당성 등 교육운동과 배일사상(排日思想)을 펼쳤다.1910년 일본에 의해 국권(國權)이 상실되자 고향에서 호적 등록을 거부하고 이른바 ‘경절(慶節)’에 일장기를 달지 않으며 납세 및 부역 등을 거절하는 등 항일투쟁을 하였다.1913년
손병희 선생 유허지(孫秉熙 先生 遺墟地)는 충북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의암로 234번지에 위치하고 있다.유허지(遺墟地)란 ‘그대로 남겨진 터’를 이르는 말로서, 이곳은 3.1운동을 주도했던 의암 손병희 선생이 태어나서 22세가 될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청주시에서 1991년부터 1999년까지 정비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손병희 유허지는 의암영당 및 삼문, 담장과 유물 전시관을 건립하여 후손들을 맞이하고 있다.유허지 입구에 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32개의 태극기(太極旗)가 도열해 힘차게 펄럭이는 모습이다. 유허지 내부 손병희 선생 동상 옆에 서 있는 태극기 하나를 합치면 모두 33개의 태극기가 되는 것을 보니 3·1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의 정신을 태극기에 담아 놓
최명길 묘소(崔鳴吉 墓所)는 충북 기념물 세68호(1984. 12. 31.)로 충북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대율리 산253-4번지에 위치하고 있다.신도비를 지나 50여 미터를 가면 묘소가 나온다. 넓게 조성되어 있는 선생의 묘역(墓域)에는 3기(基)의 봉분(封墳)이 있다. 가운데에 있으면서 약간 뒤에 자리한 봉분이 최명길의 묘소이고, 서쪽이 첫 번째 부인 인동(仁同) 장씨(張氏)의 묘소이며, 동쪽은 두 번째 부인인 양천(陽川) 허씨(許氏)의 묘소이다.최명길 묘소는 50cm 높이의 호석(護石)을 둘렀고, 상석(床石), 묘표(墓表)와 앞면에 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을 갖추고 있다.상석은 높이 20cm, 너비 169cm, 두께 15cm로 남구만(南九萬)이 쓴 묘표(墓表)가 있고
최명길 신도비(崔鳴吉 神道碑)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59호(1980. 1. 9.)로 충북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 253-3번지에 위치하고 있다.신도비(神道碑)는 왕이나 관직이 높은 신하의 무덤 앞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놓음으로써 죽은 이의 사적(事蹟)을 기리는 비석을 말한다.고불고불한 길을 따라 가다보면 위엄을 자랑하듯 비각이 보인다. 그 안에 홍살을 막고 비신이 서 있다. 그 옆에는 안내판이 있다.최명길 신도비는 1702년(숙종28)에 건립하였으며, 비신(碑身)의 높이 270㎝, 폭 37㎝, 전체 높이 410㎝의 대형 비석으로, 1979년에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사면을 홍살로 둘러 신도비를 보호하는 비각(碑閣)을 세웠다.그의 묘소 앞쪽에 세워져 있는 신도비는 비
국계서원(菊溪書院)은 충북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비중리 164-4에 위치하고 있다. 1701년(숙종27)에 창건될 때에는 내수읍 국동리 국동마을에 세워졌으나, 1871년(고종8)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인해 헐어서 없어졌다.그러나 1960년 변경복의 후손들이 초계 변씨의 세거지인 현재의 자리에 다시 세웠고, 1972년에 낡고 헌 것을 수리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국계서원은 청주의 사족(士族)들이 송시열의 유지를 받들어 창건한 것이며, 박증영(朴增榮), 변경복(卞景福), 이덕수(李德洙) 3명을 모셨고, 이후 이수언(李秀彦)을 추가하여 지금은 4인을 제향하고 있다.서원의 구조를 살펴보면 정면 3칸과 측면 1칸에 분합문을 달고 마루방에 쌍문을 달았다.‘국계사
비중리(飛中里) 석조여래입상(石彫如來入像)은 충북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비중리 209-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석조여래입상은 마을 어귀 석조삼존불상의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삼국 시대의 절터로 추정되나 현재는 거의 찾을 수 없고, 주위는 철제로 만든 담장을 둘러 보호하고 있다. 불상의 전체 높이 150cm, 너비 115cm이며, 폭이 좁고 상하가 긴 기둥 모양에 높게 부조되어 있다. 얼굴 모양이 많이 손상된 상태이며, 이중의 두광이 표현되어 있고, 목에는 삼도가 없다. 법의는 썩 설피고 얇은 비단[통견(通肩)]으로서 타원형의 층계를 이루며 흘러내렸고, 옷 주름은 굵고 대담하게 표현하였다.무릎 아래에는 치마가 두툼한 옷 주름을 보이게 흘러내렸고 발 가까이에서 다시 층계를 이루었다. 수인의 왼
충북 유형문화재 제114호(1982. 12. 17.)인 비중리 석조삼존불상(飛中理 石造三尊佛像)은 충북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비중리 209-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불상의 주위에는 아주 오래된 느티나무와 몇 개의 바위가 놓여 있어 돌에 새겨진 부처님과 벗하고 있다.불상은 비각[비바람 따위를 막기 위하여 그 위를 덮어 지은 집]의 안에 자리하고 있는데,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홍살[대문이나 중문 위에 만들어 댄 창살]을 설치해 놓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일광삼존석불이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는 비중리 석조삼존불상은 하나의 광배(光背) 안에 3구(軀)의 불상을 함께 부조한 것으로 현재의 불상은 4조각으로 파손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본존(本尊)의 몸통과 머리 부
문정영당(文貞影堂)은 충북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 208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숙종 때 소론의 영수로 활동하고 영의정(領議政)에 8번이나 오른 최석정(崔錫鼎)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한 사당이다. 2015년 청주시 향토유적 제140호로 지정된 문정영당은 1955년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목조로 된 기와집의 형태로 지었다. 내부는 통간 마루방에 1개의 쌍문을 달고, 앞마루를 놓았다.문정영당은 지금은 민가로 둘러싸여 있어 한눈에 찾기는 힘들어 보인다. 아직도 그 마을에 살고 있는 후손의 도움을 받아 어렵게 찾아간 문정영당 내부에는 관복을 입은 최석정 선생의 영정이 자리하고 있었다.보물 제1936호로 지정된 최석정 선생의 영정은 현재 원
목은영당(牧隱影堂)은 충북 청주시 청원구 주성동 50번지[충청대로 272번길 230-14번지]에 위치하고 있다.목은영당은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과 부속 강당이다.목은영당은 이색의 학덕과 청주에서의 유서를 기리기 위하여 후손인 한산이씨 이붕해(李鵬海)와 그의 종형 이조해(李朝海)가 주도하여 1714년(숙종40)에 주성리에 건립하였다.청주에서 내수 쪽으로 가다가 오른쪽으로 돌면 바로 목은영당이라고 쓰여 있는 큰 돌비석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고불고불한 길을 가다보니 넓은 잔디밭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는 제법 큰 연못이 자리하고 있다.지금의 영당은 1987년에 보수한 것으로 건물은 홍살문, 영당, 강당, 내삼문, 외삼문으로 배치되어 있다.
최영 장군 기봉영당(崔瑩 將軍 奇峰影堂)은 충북 청주시 청원구 외평동 150-44번지에 위치하고 있다.고려 후기의 명장인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 무민공(武愍公) 최영(崔瑩) 장군(將軍)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이다. 장군(將軍)의 호인 ‘기봉(奇峰)’을 따서 명명한 사당이며, 1854년(철종5) 철원 최씨(鐵原崔氏) 후손들이 창건하였다.청주에서 오근장역 가는 길에 우측으로 ‘무민공최영장군영당(武愍公崔瑩將軍影堂)’이라고 쓰여 있는 돌 비석이 장엄함을 느끼게 한다. 연꽃 방죽 앞에 있는 비석을 끼고 우회전해서 외평리로 진입을 하여 100여 미터를 가면 왼쪽으로 경로당이 보이고, 마을 길목을 따라 가다보면 몇 채의 집이 있는 가운데 영당이 보인다. 기봉영당은 서향을 하고 있으
김정환(金貞煥, 1895. 9. 16.∼1964. 3. 31.)은 충청북도 청주군(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신기리 출신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한 인물이다. 김정환은 충북 청주군(淸州郡) 북이면(北二面) 신기리(新基里)에 있던 북이면사무소의 서기로 근무하던 중 1919년 4월 1일 오후 8시 경 동면(同面) 신대리(新岱里) 앞산에서 동료 김호상(金浩相)의 주도로 전개된 독립만세 시위에 이시우(李始雨), 장성이(張星伊)와 함께 참가하였다.그는 김호상이 신기리 마을 안을 돌며 주민들에게 함께 만세를 부를 것을 권유하자, 이에 적극 동참하여 주민들을 이끌고 함께 신대리 앞산에 올라 조선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이 일로 김호상, 이시우, 장성이와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김재형(金在衡, 1890. 1. 8.∼1966. 5. 30.)은 충청북도 청원군 강내면 궁현리 출신으로 3.1운동 당시 청주와 인근 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 만세 시위를 일으키게 한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이다.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순옥(舜玉), 호는 비은(費隱)으로 김원묵(金元默)의 아들이다.그는 경성 매일신보 기자 출신으로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에서 매일신보(每日申報) 판매업을 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1일 고종의 국장(國葬)에 참배하기 위해 경성(현 서울)으로 갔을 때 독립만세 운동이 전개되는 것을 직접 보고, 고향으로 돌아가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귀향 후 은밀히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중 1919년 3월 23일 청주군 강내면(江內面
김재갑(金在甲, 1880. 12. 3.∼1926. 5. 7.)은 충청북도 청주군(현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 태성리 출신으로 경북 상주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다른 이름은 김재신(金在申)이다.그는 경상북도 상주군 화북면 장암동(壯岩洞)에 살면서 구장(區長)인 이성범(李聖範), 이용회(李容晦), 홍종흠(洪鍾欽) 등과 독립만세 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의하고, 4월 4일에는 인근 지역에 함께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킬 것을 권유하는 권고문을 보내는 한편,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 준비를 진행하였다.4월 8일 오후 2시 김재갑과 일행은 약 70여 명의 시위 군중을 모집하여 함께 문장산(文藏山)에 올라가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러한 행동을 알게 된 상주(尙州) 일본 헌병과 수비대가 와서
김수사(金修史, 1912. 2. 11.∼1984. 10. 22.)는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석교동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민족혁명당 당원으로 상해와 남경 등지에서 활동한 인물로 다른 이름은 김진원(金鎭源)이다.그는 1935년경 상해(上海) 남경(南京)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신규식(申圭植), 신익희(申翼熙) 등이 결성한 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당원으로 항일독립운동을 하였다.민족혁명당은 1932년 1월 일본이 자국민 보호를 위하여 상해를 점령한 상해사변(上海事變)을 일으키고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움으로써 본격적인 중국 본토 침략을 시작하는 등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독립운동 세력의 총집결과 통합운동을 벌이기 위하여 각 단체의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들이 모여서 세운 정당이다.김수사는 1937년에
김성관(金聖寬, 1864.∼1907. 11. 17.)은 청주 북강외이면 불당(北江外二面 佛堂, 현재 오창읍 원리) 출신으로 한말 의병활동을 한 인물이다.그는 1907년 9월부터 충북 청주(淸州)·충남 천안(天安) 목천(木川) 등지에서 같은 오창 출신인 박반문(朴扳文), 조성여(趙聖汝), 천성십(千聖十) 등과 함께 의병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군수품 모집과 의병들의 무기 수리, 길안내 등 이었다.1907년 11월 천성십 등과 함께 청주군 북강외이면(北江外二面)에 사는 이참봉(李參奉)으로부터 6원을 수령하는 등 군자금과 군수품(軍需品) 모집 활동을 했다.그러던 중 1907년 11월 17일 오후 3시 경 박반문, 조성여, 천성십 등과 함께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호송되
김명심(金明心, 1881.∼미상)은 충청북도 청주 북강내일면(北江內一面) 신안리(新安里) 출신으로 한말 의병활동을 한 인물이다. 그는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는 농민이었으나, 일제가 대한제국을 식민지화를 진행하고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는 등 전국적으로 수많은 의병 활동이 일어나자 청주 일원에서 활동 중인 한봉수 의진에 참여하였다.1908년 음력 3월 한봉수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의병활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총기를 휴대하고 충북 청주군 산내일면 판교리(板橋里) 홍씨와 묵방리의 이종익(李鍾翊)에게서 군자금을 징수하였다.1908년 음력 6월 북강외일면(北江外一面) 백자동(柏子洞)의 일본협력자 방사련(方士連)이 군자금 모집 등의 의병 활동을 하는 동료 2명을 일본 경찰서에 몰래 신고하여 상실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