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무엇으로 사느냐고 묻는다면...“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질문했던 톨스토이의 탐구는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화두이다. 어떻게 살아야 인간인가, 인간다움의 존엄함을 잃지 않은 채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이어지는 질문 앞에서 늘 답은 묘연하다. 많은 이들이 바라 마지않는 모든 것들을 가진 이들조차 번번이 삶의 곤경 앞에서 무기력하게 항복하고 마는 현실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지구 정반대 편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루시 워커의 (2010)와 이승문의 (2016)를 보면서 이 골치 아픈 문제를 풀 수도 있지 않을까, 더불어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까지 덤으로 얻으면서 말이다.브라질 태생으로 뉴욕에서 활동하는 현대 미술가이자 사진작가
“미안합니다...사랑합니다...”옹이 박힌 손이 얼굴 가까이만 와도 진저리를 쳤다. 그 손으로 속 고쟁이를 열심히 더듬어 사탕 한 알 입안에 넣어주거나 잔뜩 구겨진 지폐 한 장 손에 쥐어줄 때도 괜스레 심술 맞게 굴었다. 잔소리 대마왕인 누구처럼 공부해라, 치워라 닦달하지도 않았던 할머니에게 우린 왜 그렇게 못되게 굴었을까. 그리 못되게 굴었으면서 또 왜 그리 그리워할까. 이정향의 2002년 작품인 와 이소현의 2015년도 다큐멘터리 은 할머니와 함께 했던 시간을 담는다. 그 짧았던 여름날은 쑥스러운 반성문으로, 짧지 않았던 마지막 날들은 애절한 러브레터로 완성된다.“인사 드려. 외할머니셔.” “그게 뭔데?” 외할머니(김을분)를 소개하는 엄마의 말에 상
여성 정체성의 탐구, 그 호방함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자신의 영화 초반 잠깐 모습을 드러내는 카메오 출연으로도 유명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우디 앨런, 멜 깁슨 등등부터 최근 안젤리나 졸리까지 오랜 배우로서의 연륜을 바탕으로 출중한 연출역량을 과시하는 경우는 적지 않다. 하정우, 정우성, 유지태, 양익준, 구혜선 등 한국영화계에서도 이른바 ‘투잡’을 뛰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문소리의 (2017)와 정가영의 (2016)는 여기에 다른 면을 더한다. 연출자 문소리와 정가영이 각각 ‘문소리’와 ‘정가영’이라는 극중 인물을 연기할 때 실제와 가상은 경계를 나누다가도 교묘하게 뒤섞인다.“안 바빠요. 집에서 애 키우고 시나리오 기다리고…” 18년차 배우 문소리
퇴로는 없다…오직 앞으로 나아갈 뿐!세상은 여자, 남자 어울리며 살아가는데, 그 세상을 근사치에 가깝게 담아내는 영화세상에서는 왜 여자들을 보기 힘드냐는 불만이 끊이지 않는다. 남자 배우(들)의 얼굴로만 꽉 채운 포스터들 앞에서 여성의 부재를 한탄하거나, 여성인물들을 얄팍하게 소모하는 영화들에 일일이 분노하기도 지쳤다고? 그렇다면 윌리엄 올드로이드 감독의 (2016)와 존 매든 감독의 (2016)을 만날 시간이겠다. 좀처럼 스크린에서 보기 힘들었던 여자들, 어안이 벙벙할 만큼 압도적으로 강력한 그녀들을 만날 수 있다.결혼식의 신부, 캐서린(플로렌스 퓨)의 옆모습을 뒤에서 보여주는 장면으로 는 시작된다. 오른쪽에 선 신랑의 얼굴을 보여주지
뿌리 뽑힘과 뿌리 찾기...상처와 ‘희망’5월 11일은 ‘입양의 날’이다. 오랜 ‘해외입양’이라는 역사를 극복하고 국내입양을 활성화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10월 5일은 세계한인의 날이다. 720만 재외동포의 한민족 정체성을 정립시키고 긍지와 자부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2007년부터 지정됐다. 1975년 아홉 살 나이로 프랑스로 입양됐던 우니 르콩트와, 1987년 부산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입양된 사만다 푸터먼은 ‘입양아/해외한인’인 자신들의 이야기를 극영화 (2009)와 다큐멘터리 (2015)를 통해 들려준다.아빠(설경구)와 함께 시장에 들른 진희(김새론)는 한껏 신났다. 예쁜 새 옷도 사고, 근사한 구두도 사고, 큼직한 케이크도 샀다. 버스를
“이런 사랑, 꿈꿔도 될까요…”점점 사랑을 믿기 어려워지는 세상에서 사랑의 판타지를 설득시키기란 더욱 힘들어진다. 진부하고, 지루하고, 하나도 궁금하지 않을 뻔한 이야기들만을 반복해서는 좀처럼 관객들의 마음을 파고들기 어렵다. 하지만 어떤 영화들, 가령 폴 토마스 앤더슨의 (2002)나 빈센트 갈로의 (1998) 같은 영화는 마치 고난도 허들 경기와도 같은 ‘달콤한 사랑영화 만들기’의 미션을 가뿐하게 수행한다. 거칠고 난폭하고 불쾌하고 때로는 위험하기까지 한 남자-‘야수’들이 천사와도 같은 여자-‘미녀’를 만나 비로소 어른-인간이 되는 이야기를 통해 사랑의 마술적 효용을 매혹적으로 설파하는 것이다.작은 회사를 운영하는 베리 이건(애담 샌들러)에게 사
어떤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어떤 상처 앞에서,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상처와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절박한 것이 된다. 그리고 치유의 어려움 혹은 불가능함 때문에 이는 더욱 간절해진다. 여성 감독 린 램지가 만든 (2012)와 남성 감독 케네스 로너건의 (2016)는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오가면서 상처의 주변을 기웃거리는 것이 예술의 속성이자 본령”이라는 말에 응답하면서 “상처의 얼굴을 조금 더 응시”(왕은철, 『트라우마와 문학, 그 침묵의 소리들』)한다. 더없이 가슴 아프지만, 달리 무언가 더 필요하지 않을 만큼 충실하게.“지옥에나 떨어져버려. 이 마귀 같은 년아!” 길 가다가 느닷없이 주먹세례를 받아도, 집의 벽과 차량 유리창이 번번이 빨간색 페인트로
상처받은 타자의 얼굴에 응답하기리투아니아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1906~1995)는 주체가 주체로서 자신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 조건을 타인과의 윤리적 관계 속에서 모색한다. “헐벗은 모습, 고통 받는 모습,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불의에 의해 짓밟힌 자의 모습으로 타인이 호소할 때 그를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책임지고, 그를 대신해서 짐을 지고, 사랑하고 섬기는 가운데 주체의 주체됨의 의미가 있다는 것”(강영안,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이다. 벨기에의 형제감독 다르덴이 만든 (2016)과 이탈리아 이바노 데 마테오의 (2014)는 서로 정반대의 방향에서 레비나스적 화두에 화답한다.제니(아델 에넬)는 벨기에의 공업도시 리에주의 작은 병원에서 임시직
“함께 날아요, 저 하늘로…”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는 끊이지 않고 우리들을 찾아온다. 평범한 이들은 어쩌면 단 한 번도 맛보지 못할 궁극의 절정, 그 희열의 순간을 맞닥뜨릴 행운의 소유자들의 이야기는 종종 신화적 아우라에 싸인다. 하지만 결국 그들조차 인간이었음을 이야기하는 순간들이 있어 평범한 이들과의 공감은 가능하다. 탄광촌의 미운 오리새끼가 아름다운 백조로 변신하는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2000), 우크라이나의 세계적인 천재 무용수 세르게이 폴루닌의 다큐멘터리인 (스티븐 캔터, 2016)는 천부적 재능을 부여받은 이들의 도약과 하강, 좌절과 비상의 이야기를 들려준다.펀치백 앞에 선 소년의 몸이 출렁인다. 피아노 반주에 맞춘 ‘하나, 둘, 셋…’ 구령에
“증오해요, 사랑하는 아버지…”세상 모든 관계가 다 쉽지 않다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특히 어렵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진단도 어렵고, 그런 만큼 처방은 더욱 힘들다. 적잖은 영화에서 갈등 해소가 지나치게 안이한 봉합으로 머물거나, 끝내 화해에 이르지 못한 파국에서 느닷없이 걸음을 멈추는 것도 그 때문이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로버트 듀발의 나이를 뛰어넘는 카리스마와 원숙함이 불꽃을 튀는 (제임스 돕킨, 2014)와, 연출·각본·주연을 맡은 양익준의 존재감이 압도적인 (2009)는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 다다른 두 개의 종착점을 선명하게 대조시킨다.“난 네 바람막이 돼주고 주머니에 돈 채워주고 옷 입혀주고 먹여줬다. 내가 졸업식에 안 갔다고? 대학 등록금은 누가 내줬는데
숭고했던 삶의 시간을 증언하다제주 출신의 고희영 감독이 만든 (2016)은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제주해녀문화를 7년 동안 관찰한 다큐멘터리다. 김혜정 감독이 4년의 시간을 공들인 다큐멘터리 (2011)은 1950년대 전성기를 구가했던 여성국극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한국 고유의 생활문화거나 문화적 자산으로서 소중한 가치를 가졌는데도 정작 우리들에게 너무나 낯설었던 제주의 해녀문화와 여성국극의 역사는 두 편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망각의 어두운 터널로부터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제주 출신이지만 일찌감치 뭍으로 떠났었던 의 고희영 감독은 마흔 넘어 암 진단을 받고 돌아온 고향 제주에서 비로소 해녀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간다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지위, 그 밖의 많은 걸 갖고 있는 중년의 지식인과, 어떤 것도 내 것으로 확정짓지 못한 불안한 청춘. 미아 한센-러브의 (2016)과 노아 바움백의 (2012)에서 두 주인공 여성의 처지는 파리와 뉴욕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멀다. 하지만 삶의 곤경은 때와 장소, 사람을 가리지 않고 무시로 찾아오기 마련. 그럴 때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삶의 항상성, 균형감 확보에 고군분투하는 치열함으로 두 여성은 하나의 지점에서 만난다.“새로운 사람이 생겼어.” 25년 동안 두 아이 키우며 결혼생활을 함께 했던 남편 하인츠(앙드레 마르콩)는 “그 사람이랑 살 거야”, 단호하게 말했다. 덕분에 나탈리(이자벨 위페르)의
무엇을 말하는가, 누가 보이는가…아이는 종종 무구한 관찰자 역할로 불려와 영화의 문을 연다. 대개 소년의 몸을 갖는 그 아이에게는 무언가를 발견하는 역할이 주어지는데, 봉준호 감독의 (2003)에서 메뚜기를 잡던 까까머리 소년은 황금빛 들녘에 감춰진 핏빛 죽음을 파헤칠 주인공 형사를 관객에게 소개한다. 이창동 감독의 (2009)에서도 여름날, 조용히 흐르는 강 옆에서 어린 소년들이 놀고 있다. 놀이에 열중한 친구들에게서 혼자 떨어져 나온 소년이 강물에 떠내려 오는 시커먼 무언가를 발견한다.어두컴컴한 농수로에서 박두만 형사(송강호)가 본 건, 개미들에 까맣게 뒤덮인 여성의 벌거벗은 몸이었다. 손은 뒤로 묶여있고, 맨 다리에는 메뚜기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유
뒤돌아보지 말고 나아가기 …때로는 미련으로, 혹은 아쉬움으로 가슴 한 구석을 차지하다가 돌아갈 수 없기에 더욱 간절한 소망으로 어느 결엔가 덩치를 키우기도 하는 게 바로 ‘과거’라는 애물이다. 없던 셈치고 잊을 수도, 그렇다고 언제까지 품에 안고 더딘 걸음을 내딛기도 마땅찮은 순간에 혹시 놓여있다면,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2002)와, 이윤기의 2008년 작품 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어떻게 과거와 만날 것인가, 혹은 어떻게 과거와 헤어질 것인가를 알려주는 쏠쏠한 팁이 될지도 모르니까.이름도 생소한 핀란드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 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어두운 밤, 혼자 기차
그들은 끝내, 돌아오지 못한다프랑수아 오종의 에서 사라진 남편처럼, 누군가의 실종이라는 소재는 많은 영화들에서 효과적으로 쓰인다. 일상을 뒤흔드는 충격으로 극적 긴장감을 주기도 하고, 아무런 준비 없이 남겨진 이의 공허한 일상을 통해 상실의 긴 그림자를 보여주기도 한다. 특히 최근 한국의 스릴러물은 사라진 누군가를 찾는 긴박한 달음박질과 거친 호흡에 매료돼있다. 그 가운데 여성감독들이 만든 두 영화, 변영주의 (2012)와 이언희의 (2016)는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는 동시에 또한 일그러뜨리는 공통점과 차이점으로 눈길을 끈다.일본 버블경제 시기를 배경으로 한 미야베 미유키의 추리 소설을 각색한 변영주의 에서 주인공 문호역을 맡은 이선균은 항상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은, 어디로 갔을까”사랑해서 결혼하고 오랜 시간 함께 하며 늙어가는 부부. 각각 다른 뿌리에서 자라나 하나의 나무로 자라나는 연리지처럼, 어떤 이들은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해로한다. 프랑수아 오종의 프랑스 영화 (2000)과 앤드류 헤이의 영국 영화 (2015)에서 오랜 세월 함께 한 두 쌍의 부부도 그럴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었다. 어느 새 주름 가득해진 배우자 얼굴에서 야속한 세월의 흔적을 확인할수록 더욱 신뢰와 연대가 깊어가는 삶을 살고 있다고, 오랜 시간을 함께 했기에 믿을 수 있었다. 바로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남편이 사라졌다. 여름마다 찾았던 랑드의 별장에 짐을 풀고 바닷가로 나갔던 날, 자신의 등에 오일을 발라주고 수영하러 간
“지워버린 시간, 잃어버린 이름을 찾아서”여성은 ‘집 안의 존재’로 그려진다. 종종 ‘집’ 그 자체와 동의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집을 떠올린다는 것은 집/안에 있는 누군가, 대부분은 여성인 엄마를 대상으로 하며, 집을 그리워한다면 대개 엄마를 보고파하는 마음을 달리 표현한 것이 된다. 그런데 많은 영화들에서 정작 집을 지키며, 집 자체로 환원되기까지 하는 당사자로서 여성/엄마들은 자꾸만 집을 떠난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2009)에서 럭셔리한 대저택의 안주인과, 레베카 밀러의 (2009)의 주인공 또한 집을 나서고 만다. 더 이상 자신의 집에서 살기를 거부하고 떠나가기까지, 그녀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밀라노에서 직물업으로 막강한 부를 일군
인간을 ‘근심’하고, 다른 삶을 ‘상상’하다‘욕하면서도 본다’는, 강력한 흡입력과 중독성을 가진 막장 드라마가 한국 텔레비전의 전유물이기만 할까. 세계적으로 이름 높은 할리우드 톱클래스에서도 막장드라마를 만든다. 얽히고설킨 우연, 극단적 상황의 반복으로 보는 이를 짜증나게 하는 막장드라마도 지극히 합리적이고 품격 있는 여느 영화들만큼 쓰임새가 있음을 일깨운다는 차이가 있을 뿐. 1930년대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한 우디 앨런의 (2016)와,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두루 받은 레베카 밀러의 (2015)은 막장드라마가 삶을 사유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방식의 흥미로운 성과를 보여준다.‘당사자들에게는 더없이 절실하고 애절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지지받지 못하거나 고통을 주는
더 이상 ‘아이’만은 아닌 나이, ‘어린이’ 세상의 강물에 조금씩 어른 세상의 짠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때. 그건 아마 초등학교 4학년 때가 아닐까. 정지우 감독의 영화 (2016)과 윤가은 감독의 (2015)을 보면 확실히 그런 것 같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몰라도 좋았던 것들을 하나씩 깨쳐간다. 맑은 눈망울에 조금씩 그늘이 드리워지는 그 시간을 ‘성장’이라 치장하는 건 매정하고 가혹하지만, 이 악물고 버틴 그 시간 덕분에 먼 길을 걷기 위한 근육이 여린 종아리에 자리 잡기도 한다.준호(유재상)의 얼굴은 동글동글하니 선하게 웃는 상이다. 유치원 아이가 그릴 법한 달님 얼굴 같다고나 할까. 열심히 자맥질을 치고 수영장 밖으로 나와 친구들과 함께 할 때 준호는 천생 아이다. 돈
내남없이 팍팍하고 살기 힘들다는 세상. ‘냉대’나 ‘박대’ 또는 ‘적대’라는 말이 차라리 가깝고 친근해질수록 ‘환대’는 점점 버겁고 부담스러워진다. 힘들거나 어려움에 처한 누군가를 내 집 내 삶의 반경에 들여놓고 무심한 듯, 생색내지 않고 따뜻한 차 한 잔, 부드러운 손길을 건네는 건 정말 어렵다. 그렇게 누군가에 대한 환대의 기억은 점차 흐려지고, 세상은 딱딱해져 간다. 벨기에의 형제 감독 다르덴의 (2011)과 영국 리얼리즘 영화의 최전선, 켄 로치 감독의 (2016)를 다시, 함께 봐야하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타당하고 합리적인 이유 등등 까다롭고 장황한 사유들이 없는 채로, ‘그저/그냥’ 이루어지는 따스한 환대가 거기 있다.일은 동네 치과 대기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