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요’라 맞서는 결기의 가치모두가 ‘그렇다’고 한 목소리로 말할 때 ‘아니요’라 맞서는 건 쉽지 않다. 하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게 당연시되고 권장되거나 강요될 때, 그 시선 방향에 맞서거나 반대의 방향에서 바라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너무 어렵기에 더욱 그렇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2015)와 배우 조지 클루니의 두 번째 연출작 (2005)은 냉전의 억압으로 차갑게 얼어붙었던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두 영화는 현대사의 진행을 가르게 될 중요한 역사적 국면에서 터져 나
친근하거나 낯선, 그리고 그리운...본명이 우치다 케이코인 일본 여배우 키키 키린이 지난 9월 15일 향년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1961년 극단 분가쿠좌에 입단한 이래 반세기 넘도록 연기 열정을 불태운 그가 한국의 영화팬들에게 인상적으로 각인된 것은 연기 인생 후반부 특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의 협업을 통해서였다. 고레에다 감독과 처음 만났던 2008년 에서 키키 키린은 늘 보아왔기에 익숙한, 그러나 몇몇 순간 섬뜩할 정도로 낯설기도 한 어떤 엄마의 얼굴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아쉬움 속에 그를 떠나보내면서 지
예술과 삶에 경의를 표하다‘영화 만들기에 관한 영화’는 영화사의 한 귀퉁이를 당당히 차지하며 많은 영화팬의 지지를 받고 있다. 1963년에 만들어진 페데리코 펠리니의 과 장 뤽 고다르의 , 프랑수아 트뤼포의 (1973), 로버트 알트만의 (1992) 등 끝도 없다. 그런데 걸작, 명작을 기리는 열렬한 찬사와 함께 영화사에 기록된 리스트에서 여성감독의 작품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게 불만이거나 안타까운 이들을 위한 추천작. 샐리 포터의 (1997)과 아녜스 바르다의 (2017)을 보시라! 영화감독 샐리 포터는 패션모델과 디자이너의 살인을 추적하는 스릴러 영화 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하지만 고전
“내 잘못이 아니야...나는, 괜찮아!”‘상처’라는 이름의 쓰나미가 온 몸과 마음을 덮치던 시간들은 끔찍했다. 다시 눈 뜨고 밥 먹는 일상을 영영 되찾지 못할 것처럼, 미래라는 기회가 다시는 주어지지 않을 것처럼 암담했다. 하지만 고통은 상처의 시간 뒤로도 오랫동안, 끈질기게 계속된다. 필사적으로 상처와 싸우며 밥 먹고 잠드는 일상의 시간을 견뎌내기. 그럼으로써 앞으로 나아가기. 구스 반 산트의 (1997)과 데스틴 다니엘 크리튼의 (2013)는 어쩌면 상처 그 자체보다 더 힘겨웠던 사건 다음의 많은 날들을 이야기한다.폭행, 자동차 절도, 경찰 사칭, 체포 불응... MIT 대학교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스무 살 윌 헌팅(맷 데이먼)의 화려한 범죄 경력은 밑바닥 계층의
‘그들만의 세상’을 돌파하다누군가는 아무도 가지 않은 낯선 길을 간다. 자신이 선택했든 선택 당했든, 내딛는 모든 발걸음이 ‘최초’로 기록되는 삶을 지켜보는 건 흥미롭다. 특히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이유로 사회적 자원을 박탈당하거나 다른 이들과 동등한 기회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최초’의 영예를 차지하는 이야기는 더욱 그러하다. 흑인 여성에 대한 전형적이고 정형화된 상상력을 깨뜨린 데오도르 멜피의 (2016)와, 인상적인 여성서사로 남다른 클래스를 새삼 과시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2017)가 주는 감흥은 묵직하고 깊다.고물차가 또 말썽이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으로 출근하던 캐서린(타라지 P. 헨슨), 도로시(옥타비아 스펜서), 메리(저넬 모네이)는 길
“그렇게 부모가 되어간다”제도이거나 구조로서의 가족은 세상의 많은 영화들에 탐구주제를 제공함으로써 다양하고도 풍요로운 영화 리스트를 만드는데 기여했다. 가족이라는 제도와 인간의 삶을 연결하는 강하고도 질긴 끈이 끊어지지 않는 한 언제까지고 가족에 대한 영화적 탐구는 이어질 것이다. (2016)라는 아릴드 안드레센 감독의 노르웨이 영화와 이동은의 (2017)이 맞닿는 접점 또한 ‘가족’이다. 두 영화는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우리는 가족일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질문한다.사랑스러운 아내 카밀라(엘렌 도리트 페테르센), 귀여운 6살 아들 다니엘(크리스토페르 베치)과 함께 하는 행복이 넘치던 시간은 너무 짧았다. 갑작스러운 자동차 사고로 떠나간
"그 아이들은 자라지 못한다"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강력하게 고발하는 사회적 약자들 중 단연 두드러지는 것은 아이들이다. 성장을 거부당하거나 고통에 잠식되는 어린 영혼들에 관한 영화가 크고 작은 전쟁을 배경으로 꾸준히 만들어지는 것은 안타깝지만 바로 그 때문이다. 전쟁이라는 ‘동정 없는 세상’(에릭 로샹의 1989년 영화 제목)에서 아이들은 어떻게 버텨갈까.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1948)과 기예르모 델 토로의 (2006)는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끔찍하거나 가슴 아픈 상상력을 제시한다.전쟁은 끝났다. 지축을 흔들며 밤하늘을 환하게 밝히는 공습의 공포로부터, 포탄에 온 몸이 찢기는 두려움으로부터도 벗어났지만 전쟁은 여전히 계속된
“그녀들의 집은 어디인가...”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영화는 이미 넘칠 만큼 많다. 그런데도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이어서, 가난을 말하고 가난 속에서 어떻게든 힘겹게 버텨내는 사람들의 얼굴을 또렷이 각인시키는 영화들도 계속 만들어진다. ‘N포세대’, ‘헬조선’ 등 살벌한 어휘들로 포위된 지금 한국의 현실을 담아낸 전고운의 영화 (2017)와, 우리에게는 다소 낯설지만 ‘미국 독립영화계의 여제’라 불리는 켈리 라이차트의 (2008)는 아무래도 답답하고 암울하다. 그렇지만 끝내 걸음을 멈추지 않는 그들이 있어 우리로 하여금 삶의 의지를 재점검하게 만든다.쓰레기를 담은 커다란 비닐봉지를 부스럭거리며 나타나 지저분한 것들을 날랜 손길로 치우는 큰 키의 가사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재능 있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에서 영화감독으로 변신한 조던 필레의 저예산 영화 (2017)은 개봉 24시간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어서는 흥행 돌풍을 바탕으로 최초의 아카데미 흑인 각본상 수상 기록을 세웠다. 단연 2017년의 화제작으로 꼽히는 은 기본 설정을 1967년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의 에서 직접 빌려왔다. 무려 50년의 시간 앞뒤에 놓인 두 편의 영화는 인종차별주의라는 뜨겁고 첨예한 이슈로 요동치는 미국사회를 들여다보고 성찰하게 돕는다.지역에서 신망 높은 언론사주인 매트(스펜서 트레이시)와 갤러리를 운영 중인 크리스티나(캐서린 헵번) 부부는 갑작스레 경황없는 하루를 맞는다. 외동딸 조이(캐서린 휴턴)가 하와이 여행에서 만난
“그녀들의 목소리가 들리는가”제주도의 신기한 길, 도깨비도로에 캔이나 공을 내려놓으면 낮은 쪽에서 높은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보기에는 멀쩡한 것 같지만 실제 길은 높낮이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언뜻 두루두루 공평해 보이지만 누군가, 어떤 범주에 속한 사람들은 잘 안보이기도 하고 그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기도 한다. 헤이토르 달리아의 (2012)와 로만 폴란스키의 1994년 영화 에서 아물지 않는 상처와 두려움을 안고 버텨가는 여성들의 경우도 그렇다. 두 영화에서 폭력의 피해자였던 여성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그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도록 하기 위해서 총을 든다. (두 영화의 주요 결말을 밝히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레스
자전거는 시(詩)와 사랑을 싣고...더 이상 편지를 쓰지 않는 세상이니, 어쩌면 언젠가 ‘편지’라는 말은 교과서에나 남게 될지도 모르겠다. 편지를 쓰지 않는 세상에서, 택배나 고지서 등을 전하는 우편배달부의 모습이 억압적 노동환경이나 열악한 임금조건 등을 대뜸 떠올리게 되는 것도 자연스럽다. 그러니 한 때 묵직한 가방을 둘러멘 우편배달부의 모습이 심장을 두드리며 설렘을 안겨주곤 했다는 건 아득한 신화처럼 남게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들의 기억에서 시나브로 사라져가고 있는 우편배달부를 마이클 래드포드의 이탈리아 영화 (1994)와 박흥식의 (2006)에서 만나본다.이탈리아 작은 어촌 칼라 데 소토 섬에서 사는 마리오(마씨모 트로이시)는 백수로 하는 일 없이 지내면서 어부인
나의 기쁨, 나의 자랑...사랑하며 떠나며그레타 거윅의 영화 에서 시얼샤 로넌이 분한 17세의 크리스틴은 소원하던 뉴욕에 도착하고 나서야 진저리치며 떠나온 고향 새크라멘토에 대한 사랑을 확인한다. 많은 이들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가족이 그런 것처럼 고향도 정작 함께하거나 가까이 있을 때는 소중함을 알기 어렵다. 하지만 용케도 자신이 살아가는 공간의 가치와 의미를 곱씹으며 일상을 벅찬 희열과 기쁨으로 이어가는 이들도 있다. 짐 자무쉬의 (2016)과 코고나다의 (2017)가 소개하는 인물들이 바로 그 흔치 않은 행운의 주인공들이다.미국 뉴저지 주의 소도시 패터슨에서 사는 패터슨(아담 드라이버)은 패터슨 시내를 가로지르는 23번 시내버스를 운전한다. 오전 여섯
“그렇게 해서, 나는 내가 되었다”로버트 와이즈 감독의 걸작 뮤지컬 영화 (1965)에서 폰 트랩 대령의 큰 딸 리즐은 열여섯의 나이에 첫 사랑에 빠진다. 집안 식구들 몰래 빗속에서 춤추며 “나는 열여섯, 곧 열일곱”을 부르는 소녀의 뺨은 발그레하고, 두 눈은 미래에 대한 기대로 별처럼 반짝인다. 하지만 정작 열일곱의 실제 삶은 어떨까. 번역 제목마저도 과격한 켈리 프레몬의 (2016)와 매력적인 여배우에서 출중한 감독으로 변신한 그레타 거윅의 연출 데뷔작 (2017)는 많은 이들의 기억 어디쯤엔가 남아있는 열일곱 살의 시간을 신랄하게, 익숙하게 증언한다.“난 왜 이 모양이지? 나도 내가 싫어!” 매일 아침 거울 속에서 확인하게 되는 그 얼굴
“괜찮지 않다고 말해도 괜찮아”‘애늙은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있다. 분명 아이인데 어른만큼 아니 어른보다 더 속이 깊다. 혹은 어른도 감당하기 벅찬 과제를 떠안고 분투한다. 영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닉 혼비 원작을 영화화한 폴 웨이츠, 크리스 웨이츠의 유쾌한 영화 (2002)와, 패트릭 네스의 소설을 스페인 출신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감독이 연출한 판타지 영화 (2016)의 소년들도 그렇다. 그들에게는 아이지만 어른 같은, 아이도 어른도 아닌 어중간한 자리에서 펼치는 외로운 투쟁을 응원하고 함께 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척 보는 순간 느낌이 온다. 무리 속에 끼어있어도 유독 눈에 띄게 만드는 그 무엇이 마커스(니콜라스 헌트)에게는 있다. 또래 아이들 누구도 입지
‘나’와 ‘타자’, 그리고 ‘인간’을 근심함2001년 제작된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영화 는 2차 세계대전 직후의 영국을 배경으로 한다. 팽팽하게 당겨진 바이올린 줄처럼 살벌한 긴장감을 연기한 니콜 키드만의 얼굴 클로즈업이 인상적인 공포영화다. 그보다 19년 전인 1982년에 만들어진 리들리 스콧 감독의 는 가상의 2019년을 그리는 SF 영화. 시장과 평단의 냉대로 잊힐 뻔했으나 ‘저주받은 걸작’이 되어 1992년 감독판, 2007년 파이널 컷 등으로 부활했다. 대양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대륙과도 같은 두 영화는 같은 판plate에 위치한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무엇인가” 등을 회의하고 성찰하며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핵전쟁으로 황폐해진 2
그들은 프로포즈하지 못한다각각 다른 곳에서 나고 자라 어느 한 곳에서 만나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세상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서사 중 가장 많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하나는 외로워 둘이랍니다’를 외치며 뛰어드는 결혼이라는 바다가, 사실은 절망과 고통의 블랙홀이기도 하다는 서사 또한 모르는 이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저하고 미룬다. “결혼하자, 우리!”의 용감한 제안과 무모한 결단을. 유하 감독의 (2001)의 커플과, 김대환 감독의 (2016)의 커플에게도 어렵고 두려운 선택은 예외 없이 찾아온다.영어 시간강사인 준영(감우성)과 맞선을 본 연희(엄정화)는 처음 만난 날 남들이 며칠에 나눠서 할 절차를 한방에 끝낸다. 밥 먹고 영화 보고 차 마
무덤까지 가지고 가고 싶었던, 진실...자식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이야기, 자식들이 끝까지 몰랐으면 싶은 이야기가 부모들에게는 더러 있다. 넘치는 사랑만 받아도 모자라겠기에 굳이 상처를 주면서까지 밝히고 싶지 않은 비밀 중 어떤 것들은 차라리 밝혀지지 않는 게 낫기도 하다. 그러나 꽁꽁 싸매고 덮어 가슴 속에만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무덤까지 가지고 가려는 다짐은 종종 실패한다. 야스밀라 즈바니치의 보스니아 영화 (2005)와,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스페인 영화 (2006)에서도 은폐의 봉인은 마침내 풀리고, 진실은 참혹하게 드러난다.딸 사라(루나 미조빅)의 수학여행경비 200유로를 마련하기 위해 에스마(미르야나 카라노비치)는 동분서주한다. 12살 딸아이를 친구에게 부
실수하고 만회하며…어른들도 자란다몸이 다 자라고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해서, 어른으로 불린다고 해서 더 이상 자라지 않는 건 아니다. 아이가 청소년으로, 청소년이 어른으로 자라나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현저한 차이는 없더라도, 깊어지거나 넓어지는 마음의 성장 혹은 유연해지고 관대해지는 내면의 변화는 계속된다. 어쩌면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톰 맥카시 감독의 할리우드 영화 (2011)과 루카 미니에로의 이탈리아 영화 (2010)에서 ‘아빠’ 혹은 ‘아저씨’로 불리는 중년의 남성들도 그렇게 한 발자국 나아가고, 한 뼘씩 깊어진다.뉴저지 주의 변호사 마이클(폴 지아마티)은 최근 달리기를 시작했다. 아내 재키(에이미 라이언)는 그런 남편에 감동했다지만, 가
그렇게 해서 세상은 바뀌었다!맨 손으로 떨쳐 일어나 남들이 가지 않은 거친 길을 달음박질친 사람들이 있었다. 공포와 두려움에 맞서는 그들의 거친 호흡을 따라잡고, 열정과 의지로 반짝이는 두 눈과 피땀 범벅의 얼굴을 클로즈업할 때 영화는 역사를 기록하는 매체의 소명을 떠맡는다. 1910년대 영국의 여성 참정권 투쟁가들의 이야기를 다룬 사라 가브론의 (2015)와, 1987년 한국의 6월 항쟁을 재현한 장준환의 (2017)은 좀 더 나은 세상, 인간으로 존중받는 세상을 위해 힘차게 내디뎠던 많은 이들의 걸음걸음을 카메라에 담는다.“여성은 침착하지도 조화롭지도 못해서 정치적 판단이 어렵습니다.”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면 사회구조가 무너집니다.” “남자들이 여성을 대변하는데 투
세상과의 불화...예술로 자활하다인류 역사에서 두드러진 성취를 이루었거나 인상적인 족적을 남긴 이들은 그들의 삶을 일관된 맥락에서 서사화하고자 하는 전기영화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문제는 그 영화적 상상력이 주로 남성을 선호한다는 것이고, 이는 시정돼야 할 성별 불균형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의 화가 세라핀 루이(1864~1942)의 생애를 그린 마르탱 프로보스트의 (2008)과,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1830~1886)의 삶을 다룬 테렌스 데이비스의 (2015)은 전기영화의 성별 불균형을 해소하는 주목할 만한 영화적 실례이다. 두 작품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치열한 생존투쟁, 우리가 외면했던 숭고한 정체성 탐색이라는 영화적 작업이 여성이라는 미답의 영역으로